하얀 벽 속의 할아버지.

자전거를 타고 온 그녀.

by 지각쟁이

<군대에서 제대 한 은유네 삼촌. 가족들이 증발해 버렸다.>


나의 부모님은 열 평 크기의 택배 상자 같은 공간 속에서 사셨다.


그곳은 바로 편의점이다.


태풍이 휘몰아 치던 날도 붉은 악마들로 거리가 넘실대던 날에도 관성처럼 가게 안을 지키셨다.


찾아오는 가족들이 어깨 위를 으쓱하게 만드는 나의 운동회날과 졸업식 날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소라개처럼 등딱지에 편의점을 이고 살아온 분들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여동생과 홀연 이민을 떠나셨다.


자식이 가고 싶어하는 길을 막을 수 있을까...아버지는 어디에 사시든 똑같은 편의점 안에서 사는 일이 뭐가 어렵겠냐며 큰소리 떵떵 치셨다. 잠 못 드는 밤이 오면 길어진 아버지의 한숨소리가 멀리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군에서 제대를 하였다. 사회에 나오자 무리에서 이탈한 처량한 기러기 신세가 되었다.


손 안에 쥔 모래알처럼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생활비 벌기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알바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나는 일명 집사라고 불리운다.


새로 시작한 집사 알바는 자전거로 고객이 원하는 심부름을 대신해주는 일이었다. 포장이 어려운 음식을 사서 배달해주거나 편의점 잔심부름 또는 분리수거 같은 간단한 일들을 맡아서 처리한다. 자전거 아르바이트는 쉽게 마르지 않는 체력과 건강한 몸을 지닌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떠오르는 인기이다. 건강도 챙기고 짭짤한 수익도 올리고 나름 손해 없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잘 갈아놓은 먹을 엎지른 듯 하늘에는 농도 짙은 어둠이 흩뿌려졌다. 어둠은 식지 않은 땅 위의 열기를 조용히 가라앉히고 있었다. 숨통을 쥐어짜는 듯한 한낮의 더위가 물러나고 제법 시원한 바람들이 한 두 점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날도 부지런히 야식을 포장해서 배달을 나서고 있었다.


저 멀리서 장미꽃 향기를 머금은 바람 한 점이 빠르게 콧속으로 날아들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노란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몰고 있었다. 그녀도 집사 일을 하고 있었다. 금발로 염색한 황금빛 머리를 바짝 올려 묶은 포니테일을 휘날리던 그녀는 힘차게 페달을 구르고 있었다.


그녀는 귀에 흰 떡볶이 같은 무선 이어폰을 꼽고 있었다. 짙은 눈썹은 세상일에 무관심한 듯 밖으로 곧게 뻗어있었다. 근육으로 단련된 날렵한 몸동작에 비해 가느다란 손목을 지녔다. 희고 긴 손가락으로 핸들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있었다. 그녀가 내 곁을 스치던 순간... 귓속에서 펄떡이는 심장소리들이 점점 사나워졌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저 멀리 한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녀의 꽁무니를 바라보았다.


"떡볶이 언제 가져다주실 거예요? 다 불겠네... 아무리 자전거로 온다지만 배달이 너무 느려 터진 거 아니에요?" 자전거에 매달린 노란 가방 안에는 유명 떡볶이가 포장되어 무섭게 몸집을 불리고 있는 것도 잊은 채.. 성난 고객의 재촉 문자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길거리에 휘날리거나 나부끼는 것들만 보면 가슴이 철~컹하고 오금이 저려 주저앉게 만드는 마법 말이다.





하루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묻은 유니폼을 자취방 현관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다. 금발의 말총머리를 휘날리던 그녀의 자전거가 내 머릿속을 무단 침입해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좀처럼 다가갈 수 없는 꼬여버린 내 성격이 주머니 속에 숨겨둔 먼지처럼 초라했다.


딸~깍.


벽면 위의 스위치를 더듬거리며 눌렀다. 일상에 치여 잠시 미뤄놓았던 고독들이 방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괜한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다가 연락처 목록을 내려보았다. 용건 없이는 전화를 걸만 한 곳이 없었다.


편안하게 살아가던 나의 대학 동기 녀석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왁작지걸 골목의 고깃집에 몰려가 뿌연 연기 사이로 수다 한 판을 안주삼아 저녁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갑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씨알이 말라버렸다. 요즘은 지갑들도 태어날 때부터 다른 크기의 뱃구래를 지니고 태어난다.


'어차피 내일 새벽이면 또 출근인데... 사람을 상대하는 일도 이제 왠지 모르게 피곤한걸... 혼술 한잔 해야겠다.'


퇴근 후엔 그저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혼자 쉬고 싶어졌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애인을 사귀는 것도 두터운 시멘트 벽 바깥세상으로 아늑하게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가 끝나가도 헤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 곁에서 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문득 막연하게 생각했다.


아마도 이대로의 삶은 오래 지속될 수 없으리라.




그때 쇠 밥그릇을 달그락 덜그럭~ 긁어대는 발톱 소리가 들렸다.


덕구 녀석이 배가 고픈가 보다.


얼마 전 우리 동네 전봇대 마다 긴박한 사연의 전단지가 붙기 시작했다.


잠시 열어 놓은 문틈으로 집을 나간 진돗개를 찾는다는 전단지였다. 포상금이 자그마치 100만 원이었다. 인터넷 초록창에 "집 나간 개 잡는 방법"을 쳐 보았지만 공짜로 정보를 얻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 강아지 카페에서 잃어버린 개를 찾아준다는 전문가로부터 거금 십만 원을 주고 비법을 건네받았다. 으흐흐흐~


"개가 살던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후미진 곳에 커다란 철장을 놓으세요. 그 안에 개의 흔적이 묻은 물건과 좋아던는 간식을 넣어 두고 기다리세요. 다음날이면 짜잔! "


철장을 설치하고 돌아온 날 밤. 내일이면 타게 될 백만 원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담아둔 쇼핑 목록을 뒤적거리다가 어느새 통이 텄다. 다음날 아침. 철장 안에는 빠져버린 꽁지깃 처럼 푸석푸석한 하얀 털의 개 한 마리가 바닥에 바짝 움츠러들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전단지의 사진과 번갈아 바라보니...주인이 찾던 맹스런 진돗개가 아니었다. 실망감과 허탈함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내 십만원....'


텅~비어버린 바지 주머니가 서러워졌다. 순간 마주친 개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나와 닮아있었다.


잘못걸린 녀석 때문에 화가나기도 했지만 안쓰러워 결국 동물병원에 데려갔다. 의사는 개가 뜰 장안에서 새끼를 낳고 또 낳으며 기계의 부속품처럼 살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네 발의 발톱이 갈라지고 고름이 차 있었다.


텅 비어버린 내 주머니에는 순간 다른 고민들로 차올랐다.


왠지 받고 싶지 않은 폭탄을 떠맡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자신을 닮은 개의 눈동자를 살면서 영영 지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며칠을 끙끙대며 고민 끝에 동물보호소로 가게 될 덕구의 정식 입양 절차를 맞히고 집으로 데려왔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성향 때문에 유령처럼 몰래 숨어다녔다. 밥 먹을 시간에만 나타나는 두문불출의 귀재와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팻 시터 알바 덕분인지 기억을 더듬더듬 떠올리며 덕구를 정성으로 돌보았다.


'사랑을 쏟을수록 음울하던 덕구의 눈 빛도 다리 사이로 숨어버린 꼬리도 당당하게 펼 날이 다가오겠지...'


그때를 위해서 연하늘 빛의 목 줄을 사두었다. 덕구는 은유 삼촌에게 남겨진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 다음 날 >


머리맡의 베개 위로 진동이 울리자 오늘의 일거리가 어플로 전송되었다.


"GU편의점 모기퇴치제 (수량 1) 배달 요청."


고객 요청란에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심부름을 해주시는 집사님이라고요... 모기 한 마리만 잡아주고 가세요.'


철이면 벚꽃 앞에 서서 함께 사진 찍어주는 벚꽃 알바, 스토커 퇴치용 남자 친구 알바, 최신 핸드폰 출시일에 줄 서주기 알바까지 안 해 본 알바가 없었지만...모기를 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순간은 정말 당혹스러웠다.


'찾아가서 어느 집 꼬맹이의 장난 이기라도 하면...날도 더운데 내 이놈을 아작 낼 테다...'


이를 악 문채 분노를 실은 자전거를 몰고 갔다.


[ illustrated by Kimi ]


장기임대아파트 708호.

"띵 동~"


" 이 쪽으로 들어오시구려~"


살짝 벌어진 현관문을 밀고들어갔다. 쓸쓸함이 고인 냄새가 온 집안에서 풍겨왔다. 냄새는 순간 머릿속의 기억 속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혼자 사는 노인에게서 나는 퀴퀴한 할아버지 냄새였다.


예의 바르고 말수가 적은 할아버지가 안방에 누워계셨다.


"어서와요 집사양반..아 며칠 전에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는데 그만 발을 헛디뎠지 뭡니까... 찾아와 줄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팔꿈치로 기어서 안방에 들어왔소이다. 며칠만 누워있으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기다리던 중인데...귓구멍 꿀이라도 발라 놓았는지 엥엥대는 모기 녀석들 때문에 잠을 한숨도 못 잤소이다... 심부름해준다는 청년이 모기 좀 잡아주고 가겠소...?"


노인은 씁쓸함을 숨기려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편의점에서 사 온 모기 퇴치제를 놓고 전기 파리채를 휘둘러 모기를 잡는 동안 할아버지는 어린아이 같은 눈빛으로 나의 그림자를 뒤좇았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오랜만에 바라본다는 듯한 흥미로운 눈빛이었다.


"한창 공부하랴 돈 버느라 정신없을 텐데.. 내가 부담이 된 건 아닌가 모르겠소... 청년을 보니 내 옛 모습이 떠오르는구려..." 눈동자를 돌려 회상에 빠진 할아버지의 말투에선 서글픔이 묻어 나왔다.


검버섯이 핀 마르고 주름진 할아버지의 손은 내가 움직일때 마다 부끄러운 듯 손사래를 치셨다...


집안의 분리수거와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드리고 돌아온 날은 밥이 잘 넘어가질 않았다.


캄캄한 방 안에 누워계실 할아버지의 외로움이 덧없는 두려움으로 변하더니 할배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 만 같았다.



은유 삼촌은 조그만 자취 안으로 돌아와 무심코 현관을 바라보았다.


같이 젊은 나이에 벽장 속에 갇힌 외로운 신세로 사는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눈을 감으니 어두움 속에서 작은 노란 점 하나가 다가왔다.


점은 곧 자전거 서치라이트로 바뀌었고 페달을 힘차게 밟는 노란 머리의 그녀가 나타났다.


문득 그녀와 말 한마디를 섞어보고 싶어졌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을 떠올리자. 민재 아저씨...?'


유머와 친근함으로 무장한 민재아저씨는 자신의 경험을 파는 알바를 시작하시고 부쩍 바빠지셨다.


이용자들은 의외로 젊은 여성고객들이었다. 레스토랑을 함께 가준다거나 남자 친구와의 고민에 조언을 해준다거나 말 그대로 아저씨의 살아온 인생 경험을 파는 일이었다.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여자에게는 굳이 말로하지 않아도 원하는 걸 눈 앞에 들이밀 수 있는 육감과 배짱이 필요하지!"


붉은 노을이 절정으로 타들어가는 오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아스팔트 온도로 자전거의 바퀴는 녹을 지경이었다. 금발을 휘날리는 그녀를 한 여름의 열기로부터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마음 먹고 마트에 다녀왔다. 꽃놀이를 떠나던 엄마의 스카프에서 보았던 익숙한 무늬의 쿨스카프와 냉감이 도는 팔토시를 사들고 자전거 앞에 서있었다. 그녀를 우연히 마주치면 워...원래부터 가방에 들어있었다는 듯이 시크하게 내밀어 볼 요량이다.


예상치 못했던 순간은 날벼락처럼 날아들었다.


고드름처럼 날카로운 비웃음 한 조각이 뒷덜미에 서늘하게 꽂혔다. 마침 그녀가 배달을 가고 있었다.


'피식~'


일그러진 눈썹 사이에 폭발하려는 웃음을 욱여놓고 바람처럼 사라져 갔다. 그녀의 가녀린 목에는 음악을 듣다만 헤드폰처럼 생긴 목걸이형 선풍기가 걸려있었다. 헬기가 이륙할 것만 같은 강풍을 위풍당당하게 뿜어대며 재빠르게 멀어져 갔다. 왠지 일이 꼬여버린 것만 같다.


'아씨....일보 후퇴해야겠다...'



<며칠 후>


오늘도 습관처럼 도로 위에서 페달을 구르고 있다.


순간 자신이 우주 궤도를 둥둥 떠다니는 인공위성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사는 지구는 저 멀리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주머니 속의 진동은 다급하게 바지를 붙들며 울려왔다.

"대광당 약국 파스 ( 1묶음) 배달 요청."


"고객 요청사항= 지금 좀 급합니다. 심부름값은 두둑히 드립니다. "


장기임대주택 708호 할배였다.


할배의 아파트 복도에는 뜻밖의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온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주인이 외출한 빈집에서 시커먼 연기와 불길이 활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경광등과 사이렌 경보가 벽을 튕기며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하자 머릿속 비상버튼에도 빨간 불이 들어왔다.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가 누워있을 쓸쓸한 방 한 칸이 떠오른 것이었다.


자전거로 단련된 근육 덕분에 비상계단 문을 벅차고 한 번에 두 계단씩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1층.. 2층.. 3층을 지나서 6층.... 이제 한 층만 올라가면 된다.


그런데...이게 어찌 된 일이지. 7층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난데없이 8층 나타났다. 엘리베이터 위에 적혀있는 층수를 확인해보고 다시 비상계단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럴리는 없었다... 비상계단에서 감쪽같이 7층이 증발해버린 것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비상계단에서 오리락 내리락 거리다가 7층 입구를 찾아냈다. 안도의 긴 숨을 몰아 쉬고 난 후 복도식 아파트 외벽에 있는 708호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7층으로 옮겨 붙기 시작한 불길은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데리고 나올 만큼의 시간은 있어 보였다.


은유 삼촌은 신중함과 노련함으로 연기와 불길을 피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705호 그다음 706호 707호를 지나 마지막 방으로 가려는데.... 그곳에서 복도가 끝나버렸다.


할아버의 현관이 있던 벽에서 708호 현관문이 통째로 사라졌다.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단단한 시멘트 벽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마치 커다란 지우개로 쓱 쓱 지운 듯이 사라져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마.. 말도 안 돼.....!!'


삼촌은 마치 할아버지가 벽속에서 듣기라도 할 수 있다는 듯이...


흰 시멘트 벽을 주먹이 으스러지도록 두드리고 또 두들겼다...


"할아버지!!! 지금 아파트에 불이 났어요 거기 그대로 누워 계시면 죽어요... 죽는다고요! 할아버지 제 말 들리세요? 들리시면 대답 좀 해보세요...!! 아우~ 씨!"


거동이 불편해서 자신만의 세상인 집 속에 영영 갇혀버린 할아버지.


내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존재의 할아버지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미친 사람처럼 흰 벽을 쳐대던 은유 삼촌은 방화복을 입고 출동한 소방대원들에게 방해가 된다며 쫓겨났다.


혼이나 간 사람처럼 다리가 풀린 채로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오던 중 희미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콜록콜록... 저... 좀 사... 살려주세요.. 콜록.."


기침소리는 뿌연 연기와 꾸역꾸역 뒤섞이고 있었다. 계단에는 발목을 부여잡고 쓰러진 낯익은 얼굴의 여자가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널브러져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내 머릿속에 무단 침입한 바로 그녀였다.


'아.. 아니... 당신은 또 대체 여기에... 왜.....?'


불길이 거칠게 다가오자 길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빠르게 그녀를 부축해서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부축한 그녀의 살결이 닿을 때마다... 머릿속이 감전되는 기분이었다. 짜릿한 첫 만남이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서로의 안위를 묻고 있었다. 커다란 동공을 한 눈으로 입을 쉬지 않았다. 저마다의 경험담은 조금씩 과장되어 부풀려지고 있었다. 그들 중에 708호 할아버지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날의 화마는 애꿎은 사람들만을 앞세워 세월의 저편으로 조용히 데려갔다.



그 후로 시간이 흘렀다.


708호로에서 들어온 주문은 없는 동호수를 입력한 어느 초딩 손님의 장난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삼촌은 그 날의 기이한 일이 아직 잊혀지질 않았다.


할아버지는 이 세상 어딘가 두터운 벽속에서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삼촌은 그곳에서 할아버지가 전해 준 선물처럼 노란 머리의 그녀와 숨 막히는 첫 만남을 가졌다.


그녀는 그를 고독한 방에서 세상 밖으로 구출해 준 연인이 되었다.


그 둘의 성격은 제 각각 달랐지만 대화가 잘 통해서 만남은 늘 짧게만 느껴졌다.


[ illustrated by Kimi ]


얼마 전부터 팻 시터 알바를 시작한 그녀는 새로 만난 강아지와 호수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 곁엔 은유 삼촌과 덕구도 속도를 맞추어 나란히 걷고 있었다.


푸른 목줄을 한 덕구는 새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지 당당히 편 꼬리를 쉴 새 없이 휘두르며 함께 걷고 있었다...



글. 지각쟁이.

그림. 키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