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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각쟁이 May 03. 2019

지렁이와 달팽이.

약하다고 무시하지마.

<은유의 일기>


오늘은 유치원에서 놀이터로 바깥활동을 나갔다.


하늘은 꾸물꾸물했지만 다행히 비는 안 왔다.


친구들은 놀이터에서 세 팀으로 나뉘어 놀고 있었다.


첫 번째 팀은 정글짐에서 술래잡기 놀이를 하는 친구들이었다. 두 번째 팀은 시소랑 그네를 위험하게 타며 스릴을 만끽하는 친구들이었다. 마지막 팀은 놀이터를 빙 두른 공원에서 꽃과 나뭇잎을 따서 돌로 곱게 빻아 밥상을 차리는 친구들이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

     

[ 은유가 그린 놀이터 풍경 ]


나는 봄철에 웃자란 쑥과 냉이를 뜯기 위해 풀밭을 살피고 있었다. 오늘 우리의 요리는 된장찌개였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워 풀 속을 헤집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아야! 아프잖아!요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같으니! 

자세히 들여다보니 척추가 없는 분홍 빛의 몸통에 흐느적 대고있는 지렁이를 발견했다.


“미안해 널 찌르려고 한 건 아니었어” 은유는 지렁이의 얼굴에 대고 사과했다.


“그건 내 꼬리야...얼굴은 이쪽이라고. 너는 지렁이 얼굴이랑 꼬리도 구분 못하니? 멍청하기 짝이 없군”

성질 나쁜 지렁이에게 잘못 걸렸구나 싶은 은유는...슬금슬금 뒤로 돌아가려는데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어이 거기! 어린이인간 거기 딱 좀 서봐바!”

     


<지렁이의 말>

널 오해한 건 미안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게 바로 닭의 부리랑 어린이거든.


나는 얼마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어. 집값이 싸다고 해서 왔더니 이게 웬걸 놀이터 공원인거야. 눈뜨고 코베인 격이었지. 산책이라도 나섰다간 나뭇가지를 든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장난감 신세가 되고 말거든. 하루는 어떤 아이가 알록달록한 꿈틀이 지렁이 젤리를 입에 질겅질겅 씹으며 뛰어오는 걸 봤어. 정말 충격적이었지.


하루는 풍성한 공주 드레스를 입은 한 여자아이가 날 보고 징그럽다며 빽~소리를 질르더라.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 “너네 엄마의 그 빨간 립스틱이 뭘로 만들어진 건지 알게 되면...넌 이제 엄마랑 뽀뽀의 순간이 두려워질 거다!!!” 그러자 아이는 질겁을 하며 도망치더라. 내가 허약하고 약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괴롭히는 걸 당하고만 있으려니 점점 눈물이 났어. 울 엄마가 거미의 독이나 사마귀 같은 갈고리를 물려주시지 않은 걸 원망도 했었지. 그렇지만 엄마는 늘 내 얼굴을 보며 너는 잘생겨서 괜찮다고 칭찬해주셨어...아무튼 이곳에서의 삶은 쉬운 게 아니었지.

     

하루는 비 오는 날이었어. 촉촉하게 흙을 적시는 봄비 소식에 밖으로 후다닥 나가봤지. 발이 없어서 그리 빠르진 않았지만 말야. 비 오는 날 지렁이들이 왜 밖으로 기어나오는지 궁금하지? 씻으러 나온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린 샤워를 좋아하지 않아. 머리카락이 없어서 머리 감을 필요도 없지. 어때 부럽지? 사람들은 지렁이들이 비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린 사실 피부로 숨을 쉬어. 땅속 집에 비가 가득 차면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는 거야.


그날도 밖에 나가 청명한 공기를 마시고 있었어. 옆반 친구 디룡이 녀석은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에서 신나게 물 미끄럼틀을 타고 있었지. 지렁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였어. 아찔하게 빨랐지. 커다랗고 빛나는 구두가 디룡이를 밟고 지나치기 전까지는 말이야...내가 태어나서 본 지렁이 중에 제일 빨랐는데 말이야. 일이 있고 얼마 후 지렁이 학교 선생님께서 혀를 끌끌 차며 말씀하셨어. “위험한 곳을 쏘다니며 노는 아이들이란 끝이 늘 그런 법이지..요즘 지렁이들이란...쯧쯧..” 그 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들이 들더라고. 어른들의 보호없이 무방비로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에서 놀게 된 어린 지렁이들만의 잘못이었을까...이야기를 듣던 내 곁으로 소리 소문 없이 미끄러져오던 달팽이 한 마리가 입을 열었다.


헉헉...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는 것 같아.”     


[ illustrated by Hyunhee Kim ]

<달팽이 마을에 벌어진 사건>

 

얼마 전 우리반에는 달팽이 친구가 전학을 왔어. 옆 마을에서 온 친구이고 이름은 민 이래.


다른 마을에서 구해온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 찬 민이네 집에서 생일파티를 한다고 했어. 초대받은 달팽이 친구들은 앞다퉈 우르르 몰려갔지. 그곳에는 처음 보는 연녹색 어린 잎싸귀들로 수북이 생일상이 차려져 있었어. 마치 허브처럼 오묘한 향기를 어내던 이파리는 알싸하면서도 계속 먹고 싶은 맛내었지. 새로운 공간에서의 낯설음은 점차 익숙함으로 변해갔어.


한참이 지나 고개를 들어 빙 둘러보았어. 친구들은 이파리를 갉아먹는데 심취해 었지.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더듬이를 열심히 흔들며 춤을 추다가 피곤했는지 잠에 골아떨어진거야. 이쯤에서 너의 예상대로 사건이 졌지.


한 줄기의 빛이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자 나는 잠에서 깨어났어. 얼마 동안을 잤는지 모르겠더라. 이곳이 아직 민이네 집은 맞는데...그 진귀한 물건들과 민이는 함께 모습를 감춘 채 사라져버렸어. 헌데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친구들은 왜 옷을 벗고 있는 걸까 생각했지. 집에 가려고 어깨를 들썩이며 달팽이집을 추켜 올리는데 뭔가가 허전했어...등에서 시린 바람 한 점이 불어오고 있었지. 곧 불길해졌어.


'다...달팽이 집을 전부 도둑맞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민이는 평범한 친구가 아니었어. 바로 민달팽였던거지. 친구들에게 정체모를 이파리를 먹여 잠재운 후 달팽이집을 싹쓸어다 훔쳐가 버린거야. 그렇게 훔친 집들은 민달팽이 마을에다 비싼 값에 팔아서 지금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대. 언제부턴가 숲 속 마을 지도자를 뽑는 선거 전단지에 민이 아빠의 얼굴이 나붙기 시작했지.


그 사건 이후 집을 빼앗겨서 알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친구들은 창피함과 수치스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어. 달팽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던데. 꿈틀대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 거였지. 주변에서는 수군거리기 시작했어. “쯧쯧쯧... 행동거지를 똑바로 했어야지. 오죽했으면 그런 일을 당했을까. 당해도 싸다!” 당한 건 우린데 그래서 아프고 슬픈 것도 우리 차지인데. 그들은 잘못조차도 우리에게 전부 떠넘겼어... 약한 이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건 식은 죽 먹기니까.   



<지렁이의 당부>    

인간 꼬맹아 잘들었지?!

이 다음에 학교 가면 공부 열심히 해서 꼭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해. 우리처럼 착하고 약하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말이야. 난 지금껏 지구를 위해 땅파먹으며 열심히 청소해 왔는데...나도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우리처럼 착하고 약한 친구를 이용하는 나쁜 친구들 좀 대신 혼내주길 바란다. 내 이 번 생의 마지막 부탁이야.


추신.

사소한 부탁 하나만 더 할게. 낚시 가는 아빠 손에 지렁이 미끼통 대신 꿈틀이 지렁이젤리 한 봉지만 쥐어주길 바란다. 우리 지렁이들은 바늘이라면 질색이거든. 그럼 잘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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