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가 없다면 결국 날아갈 수밖에 없다.
요즘 푹 빠져서 매일 자기 전에 읽고 있는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공교롭게도 오늘 3.1절을 맞이해서 읽고 있는 이야기의
배경도 ‘3.1 운동’이 일어난 그 시기에 다 달았다.
같은 목표 하에 지위불문하고 하나 된 마음이었던.
그러다 문뜩 런던을 다니다 본 노인들의 모습을 보며
한국에서 논란이 되었던 사진 하나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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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시니어 존, 60세 이상 출입금지‘
나도 그 사진을 보고 분개를 했지만, 자영업을 했던
시람으로서 업주의 입장도 이해가 갔던 터였다.
영국에 오래 살진 않았지만, 이곳에서 보이는 노년층의
광경은 좀 다르다. 물론 세대차로 인한 사회문제는
어디서나 발생한다.
정치권이나 로열패밀리의 해리와 메건이 왕족지위를
내려놓은 것에 대한 세대에 따라 극변 하게 갈린 의견이
그것을 대변해 준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현상으로 눈에 띄지는 않는다.
‘노시니어존’처럼 사회 속에서 그것을 극과 극으로
그어버린 느낌은 적다.
선진국의 지위를 오래 유지해서 그런지 길거리에서
보이는 노년층도 왠지 세련되어 보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보인다.
무리 지어 카페에 앉아있는 것도 흔한 광경이 아니다.
또한 한국처럼 두 세대 간의 문화차이가 크지 않기에
아무리 모던한 젋은층의 카페라고 결국은 노년층이
누렸던 그 문화의 연장이기에
그리 부각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에 비해, 한국은 어떤가.
어느 순간부터 모던함의 기준이 서구적인 것이 돼버려서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모던한 카페'들은 그 흐름을
따르지 못한, 아니면 따를 필요가 없는 기성세대와
사이에 선을 그어버리고 말았다.
너무 빠르게 바뀐 세상에서, 일하느라,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바빠서, 지쳐서, 잘난 서구문화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어느새 늙어버린 우리 부모님 세대는
빠르게 밀고 들어오는 그 문화에서 낙동강 오리알 같은 대접을 받곤 한다.
3.1 운동이 일어난 10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배움이란 어른들에게서나 책에서 배우는 게 전부였다.
책이란 것도 결국 전 세대 ‘어르신’들이 쓴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 세상, 변화를 주도하는 세대층은 새로운
문화를 소위 인스타그램 같이 국적불문의 소셜미디어에서 배우는 것 같다.
그래서 가뜩이나 디지털 격차로 따라오기가 바쁜
세대에게는 그런 새로운 문화자체를 따라잡는 건
너무 버거울지도 모른다.
모든 게 너무 빠르게 변해서,
서로를 이해할 과도기가 부족해서 항상 극단적인 편
가르기 생기는 슬픈 현실이다.
이렇듯 격차는 만들어졌다.
소위 말하는 디지털 격차는 공부만 조금 한다면
좁혀질 수 있다.
하지만 한나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문화격차.
이 작은 나라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구분하고,
선을 긋는 것을 좋아할까?
우리 조상들이 3.1 운동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지위불문, 나이불문 하나가 돼서 움직이는 것은 어려움이 닥쳐야만 가능한 것일까?
과연 내가 노년층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을 때,
그 격차는 좀 좁혀졌을까?
아니면 나도 ‘꼰대’라로 불리기 시작할까.
흐름이란 막을 수 없기에,
나이 드는 순서대로 더 열심히 배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각 세대 간의 존경과 양보가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다.
뿌리가 없다면 결국 날아갈 수밖에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