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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Nov 23. 2022

일로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한다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인걸요


가끔 회사에서 허무맹랑한 상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쓰나미처럼 일이 강하게 밀려 들어왔다 나간 날이면 더욱 그렇다.



‘복권에 당첨되기만 하면 당장 회사부터 때려치운다!’



제 돈 주고 잘 사지도 않는 복권이지만 당첨 후 계획에는 늘 진심을 다한다. 복권에 당첨되면 가장 먼저 이루고 싶은 소원은 단연코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이란 나에게 생계 수단을 넘어 나를 표현하고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도구'이다. 어쩐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 같지만 정말 그렇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 주는 평온함에 기대어 마음 편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데 온 집중을 다 쏟고 싶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냐고 하지만 돈이 뒷받침되었을 때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국제물류 회사에 출근한 첫날을 잊지 못한다. 서류가 잔뜩 쌓인 책상 위에 쉬지 않고 울리는 전화벨 소리와 바쁘게 두드리는 타자 소리. 선배들의 오가는 대화 속에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전문용어. 이게 한국말이 맞는지. 여긴 어디이고 나는 왜 여기 있는 건지 대혼돈의 날이었다. 머릿속에 ‘과연 내가 이 일을 정말 해낼 수 있을까?’ 걱정으로 가득 채운 채 퇴근했던 기억이 난다. 비전공자인 나에겐 진입 장벽이 높아도 너무 높은 필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일이 나랑 맞을까?'

'음, 안 해보고 알 수는 없지.'

'어렵다고 일을 안 할 거야?'

'일 해야지, 어디를 가든 처음은 다 어렵잖아.'

'취업 안 할 거야? 돈 안 벌 거야?'

'?!!!'



답은 정해져 있었다. 물러설 수 없으니 맞서야 했다. 마음에 중심을 잡고 저 높은 장벽을 하나씩 깨부숴 나가 보기로 했다. 등에 땀줄기가 흐르고 머리칼이 쭈뼛 서는 위기가 닥칠수록 점점 더 성장하고 강해졌다. 나중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사건 ·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 업계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그 당시엔 일하는 시간이 재밌는 놀이처럼 즐겁고 짜릿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험과 실력이 마일리지처럼 쌓여갔다. 업무처리 속도가 빨라지자 자연스레 많은 업무가 내 담당이 되어있었다. 일단 무엇이든 배우자는 마음으로 열정을 불태웠다. 그러자 어느덧 회사에서 일 잘하는 동료이자 부하직원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인정과 칭찬을 계속 받기 위해선 어제보다, 지난주보다, 지난달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나라는 사람이 회사에서 쓸모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걸 계속해서 증명하고 싶었다. 더 칭찬받고 더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야만 나의 존재가 가치 있고 빛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멍청한 발상이지만 그때 당시엔 매우 진지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매일 춤추는 고래가 되고 싶었다. 될 수 있으면 자주 춤추고 싶었다. 그래서 강약 조절 없이 열정을 불태웠다. 덕분에 나도 함께 화르르 불타버렸지만.



'이것도 해결 못하면 난 가치 없는 인간이야.'

'도움을 받으면 내가 온전히 한 게 아니니까 안돼.'

'혼자 해결해야 능력 있는 사람이지.'



내가 해결 못 할 일도 있다는 것을, 그럴 땐 도움을 구하면 된다는 것을, 혼자 끙끙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상하게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왠지 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분명 나에게 '일'은 나를 표현하고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도구'이다. 다만, 그것이 회사를 통해서만 발현된다는 나의 편향된 생각이 내 무덤을 파게 했다. 열정이라는 이름 아래 자기 주도 학대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회사에서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괴롭다면 '다른 일'을 찾아야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 이라던가 '하고 싶은 일'과 같은 다른 맥락의 '일' 말이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나 역시 이 각박한 세상에 순응하며 살다 보니 그게 무엇인지 찾아내기가 어렵다. 오직 나만 풀 수 있는 문제이기에 아무도 정답을 알려줄 수 없다. 힌트는 오직 내 안에 있으니 나를 자주 들여다보고 만나야한다. 그렇기에 오늘도 퇴근 후 다양한 일에 도전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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