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기 싫은 사람들
"우리가 싸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네가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야. 너는 항상 내가 내 멋대로라고 생각해. 배려심이 없고 다른 사람 감정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지."
민수는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입을 꾹 다물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채 하루는 짧고 길면 일주일도 갈 일이었다. 민정이 먼저 말을 붙이지 않는다면? 그럴 일은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 그런 걱정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큰 맘을 먹었다. 민정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은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위로하는 방법을 검색까지 해서 그대로 따라하느라 정말 진땀을 뺐다. 무척 어색했고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일들이었겠지만 그 말을 연습하느라 민정을 만나기 전까지도 입 속으로 몇 번을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던 민정이 한다는 말이 완전 골때렸다.
"내가 배려심이 없다고?"
벌써 서른이 다 되어가지만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민정과는 20년째 친구로 지내지만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민수가 생각하기에 민정은 가볍다. 가벼워도 너무 가볍고 그래서 모든 감정이 쏜살같이 날아가 버린다. 좋은 일도 금방이고 슬픈 일도 금방이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민정의 복이라면 복이다. 그래서 민수는 민정에게 공감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넌 항상 네 입장에서 생각해. "
"그건 아닌데. 내가 내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뭐하러 너네 집 전등도 고쳐주고 뭐하러 네가 힘들어하는 일에 함께 하려고 하겠어."
"전등은 정말 내가 불편해 할 것 같아서 고쳐주려고 한거야? 그런거 그냥 보고 넘어가지 못하는 네 성격 때문은 아니야 ?"
민수는 깨끗이 정리되어 있는 걸 좋아한다. 스스로 아주 깔끔한 성격이라서 그런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어질러져 있는 것보다는 정리되어 있는게 누가 보더라도 보기 좋지 않은가. 그건 민정이 별난거다. 옷을 벗어서 아무데나 집어 던지고 책을 바닥에 펼쳐놓고 재활용 쓰레기를 잔뜩 모아두었다가 버리고. 민정이 귀찮아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매번 치워주었다. 주말이면 밖에서 만날 수도 있지만 굳이 민정의 집에서 약속을 정하는 것도 기왕이면 민정의 집 청소까지 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 나를 위한 거였다고? 누가 나 좋자고 남의 집을 청소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고 남의 일에 자신일처럼 덤벼들어?
"너 속상한 건 알겠는데 왜 화풀이를 나한테 하는거야?"
"왜 내가 화풀이를 한다고 생각해? 평소에 내가 너한테 불편하게 느꼈던 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불펺했다고? 20년을 친구로 연인으로 지내왔는데 이제와서 그런 것들이 불편했다면 이제까지 참고 지내왔다는 말인데. 민수가 아는 민정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불편한 점은 남들 앞에서 민망할 정도로 명확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바로 구민정이다.
"민수야, 너는 지금 나한테 위로를 할게 아니라 사과를 해야 하는거야. 위로는 어제 했어야 했어. 오늘은 어제의 일을 나한테 사과해야 하는거야."
"도대체 뭘 사과하라는거야? 전등을 갈아준 걸 사과하라는거야? 어제 네가 속상해 했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걸 사과하라는거야? 아니면 평소에 했던 나의 행동 모두를 사과하라는 거야? 도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드는거야? 너야말로 지금 네가 열 받는다고 나한테 화풀이하는 걸 사과해야 하는거 아니야? 왜 나한테 그래? 그 판사한테 가서 그래. 아니면 그 형사한테 가던지. 아니다 그 변호사 새끼한테 가야겠다"
"너야말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지금 우리 이야기에 판사,형사, 변호사가 왜 끼어들어? 그건 너와 나 사이의 일이 아니야. 난 지금 네가 !!! 됐다. 말을 말자."
매번 이런 식이다. 목소리 쫙 깔고 마치 다른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다가 그냥 말을 하지 말자고 모든 이야기를 덮어버리고는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헤헤 거린다. 그리고는 민수가 계속 굳은 표정으로 있으면 오히려 속 좁은 놈처럼 상황이 바뀌어 버리는데 이번에는 민수도 그냥 넘어가고 싶지가 않다. 아무래도 이번 한 주는 굿이라도 해야할 판이다. 할머니에 민정이까지. 도대체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무슨 말을 말아? 사과하라며? 그럼 사과를 받아야지! 내가 무슨 일에 대해서 사과해야 하는지 알려줘야지!"
"그걸 내가 알려줘야 해? 사과라는 건 자신이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거지. 내가 너 이랬으니까 사과해 라고 하는 건 사과가 아니야. 윽박이지."
말로 민정을 이기겠다고 마음 먹으면 안된다. 그건 처음부터 지는 싸움이다. 그런 생각이 드니 민수는 더 화가 났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늦었지만 위로를 해주려고 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너는 사과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그냥 나한테 사과하고 싶지 않은거야. 내가 너로 인해서 서운하고 속 상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거야. 너는 자신이 누구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너는 항상 옳은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잖아. 그래서 상대방이 너한테 고마워 할 일은 분명히 많지만 네가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는 이릉ㄴ 절대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런 생각이 네 머릿속에서 절대 떠날 일이 없어. 그러니까 네가 하는 모든 말은 다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고 나를 위한 너의 배려라고 생각하지만 정민수!!! 너는 나를 배려한게 아니라 너의 감정을 나한테 전달한거야. 사과하지 않는다는 건 너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이야. "
내가 무슨 행동을 했으며 내가 무슨 책임을 져야하는건데? 민수는 목구멍에서 말이 옹알이를 하듯 맴도는 기분이었다.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박따박 말하는 민정이 낯설었다.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래. 말을 말자 우리."
옆자리에 있던 가방을 들쳐메고 머플러를 다시 목에 두르는 동안 평소라면 왜 그래, 민수야. 라며 잡았을 민정이 팔짱을 끼고 창 밖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뒤로 하고 민수는 카페를 나와 버렸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