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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by 리뷰몽땅

민수는 민정에게 아직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민정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연인이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손을 잡고 걷는 일도 어색해졌다.

키스를 한 적은 언제였던가?

섹스를 한 적은 언제였지?


민정의 말이 귀에 아른거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초라해졌다.

그러다가 불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는 지는. 지는 힘있는 사람이야?

왜 힘있는 사람은 꼭 남자여야 하는거지?

남녀가 평등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이럴때는 꼭 비켜가지.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다시 한숨이 나왔다.


'이런 억지를 쓰다가 꼭 구박을 먹었지. 쯧쯧'


민정이 잠자리를 피한 것은 새 집으로 이사를 간 후였다.




민수는 어릴때부터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아빠와 이혼을 한 엄마는 어느날 갑자기 민수의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민수는 할머니의 집에서 먹고 잤다.

할머니가 가방을 챙겨줬고 할머니가 숙제를 봐줬다.

할머니가 샌드위치를 만들어줬고 할머니와 맥도날드에 갔다.

아빠는 돈을 보내줬다. 한 달에 한 번 아빠가 왔던가.

그러다 아빠는 일 년에 한 번 나타났고 그리고 캐나다로 가버렸다.


입학식 사진에도 졸업식 사진에도 할머니와 단 둘이었던 민수는

그래서 늘 외로웠다.


3년 전 민수는 할머니의 병실에서 민정을 만났다.

젓가락 같은 아이였다. 늘 무표정이었지만 누군가 말을 걸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긋 웃으며 살갑게 다가오는 아이였다.

민정의 엄마도 그랬다. 암환자 같지 않았다.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할머니가

묻지 않아도 되는 말을 꼬치꼬치 캐 물어도 싫은 표정 짓지 않았다.


할머니는 민정이 예쁘다고 했다. 민수도 민정이 예뻤다.

민수는 외로웠고 민정도 외로워 보였다.

어쩌다 둘은 함께 병실을 나와 버스를 타러 갔다

민수는 민정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민정은 돈이 없다며 웃었다. 환하게 웃는 민정의 눈이 맑게 빛났다.

민수는 자신의 지갑에 돈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때는 내가 힘이 있는 사람으로 보였을까?"




쾅쾅 쾅쾅


"전화도 안하고 오면 어떡해. 내가 뭘하고 있을 줄 알고."


"벨 고장났어? 주인한테 말해. 고쳐야지"


"올 사람도 없어. "


"내가 있잖아."


민정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민수를 올려봤다.


"너는 올 때 전화를 하고 오잖아. 그리고 너는 비번을 누르잖아."


민정의 집 비번이 바꼈다는 것을 민수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나 오늘 여기서 잘거야. 옷도 챙겨왔어."


민정은 이제 입까지 헤 벌리고 민수를 바라봤다.

한참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민수는 침이 말랐다.


"화났어?"


"자고 가겠다는데 화가 났냐고 묻는 건 뭐냐?"


"그런가."


민수는 휙 돌아서 부엌으로 갔다. 달리 부엌이라고 할 건 없었다.

작은 방에 연결된 부엌은 요리를 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비닐 봉투에 한 가득 담아온 할머니 반찬을 꺼냈다.


"밥 있어? 밥 했어?"


뒤돌아선 채로 민수는 말을 꺼냈다. 제기랄

무슨 말이라도 좀 해줘라.


"너무 애쓰지 마. 밥은 냉동실에 있어"


"애는 누가 쓴다고 그래? 밥 먹자. 너 밥 안 먹었지?"


"먹었어. 방금. "


그러고 보니 짜파게티 냄새가 집안에 그대로 있다.

환기가 되지 않는 집이었다. 그래도 4개월이 지났는데

이 집은 영 적응이 되질 않는다. 어디선가 퀘퀘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반찬 가져왔는데. 밥 먹자. 같이."


민정은 말없이 냉동실에서 밥을 꺼냈다. 그리고 전자렌지에 넣고 밥을 돌렸다.

민수는 작은 식탁에 반찬을 하나하나 올렸다.

할머니는 마른 반찬을 정말 잘 만들었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맛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손맛이 어딜 가는건 아니다. 이제 이런 반찬을 먹을 날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할머니 집에서 반찬을 가지고 올 때마다 민수는 울컥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아졌다.


"할머니 집 다녀왔어?"


"응. 할머니가 너 왜 안 오는지 물더라."


"잘 계시지? 이젠 노인정 할머니들과 사이 좋게 지내셔?"


"다니던 노인정은 안 가고 다른 할머니들이랑 노는 것 같애."


"할머니도 참. 그래도 할머니는 붙임성이 좋아. 어떻게 금방 새 친구를 사귀지?"


"부럽지. 내가 할머니를 닮았어야 하는건데. 그랬다면 친구도 많을테고."


그리고 민정아. 그랬다면 내 주변에도 힘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았을까.

민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민정이 들었을까. 우뚝 서서 민수를 쳐다봤다.


"너랑 헤어지고 싶은 건 아니야. 그런 말은 아니었어."


민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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