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투정부릴 수 없다
그런 날이 있다. 평소라면 그냥 참고 넘어갔을 일인데
무슨 물 만난 물고기라도 되는 것처럼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면서 가슴 깊이 묻어둔 말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날이 있다. 어제는 그랬다. 민정은 후회했다.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세상과 담을 쌓고 산다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민수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온
우리는 별반 다르지 않은 그런 사람이 아니던가.
자신이 힘들다고 만만한 민수에게 그저 화풀이를 했을 뿐이다.
하지만 민정은 사과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한 마음이었다. 사과를 한다고 사라질 마음도 아니었다.
사과를 하려면 그런 마음을 자신에게서 지워야 했다.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었다. 민정은 정말 그랬다.
스스로 힘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늘 당하고, 늘 참고, 늘 인내하고, 늘 손해보고
그렇게 사는 인생이 이제는 지겨워졌다.
한 달음에 꼭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3층까지만이라도 올라가고 싶었다.
최소한 말도 안되는 억울한 일을 참아가며 사는
그런 인생은 이제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민정은 평범하다못해 초라한 일생을 살았다.
부모님이 듣는다면 서운할 수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하자면 그게 진실이다.
민정은 브랜드가 있는 옷을 중학교 졸업할 때 처음 입었다.
민정의 엄마는 시장에서 옷을 샀다.
그 나이에 누가 시장에서 산 옷을 입는단 말인가.
산타할아버지가 이미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초등학교 2학년 때에도 민정의 소원은
브랜드가 있는 운동화였다. 남들처럼 겨울 파카도 아니고
그저 운동화였다. 딱 한 켤레만.
민정의 엄마도 민정의 아빠도 너무 부지런했다.
두 분 다 새벽부터 일을 나갔다.
한겨울에는 너무 추운 곳에서 일을 했고
한여름에는 너무 더운 곳에서 일을 했다.
봄과 가을은 그들에게 살만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꽃피는 봄이 와도
낙엽 떨어지는 겨울이 와도
민정의 엄마와 아빠는 한결 같았다.
엄마. 우리는 언제 놀러가?
민정의 아빠는 공사장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며칠 후 돌아가셨다.
민정의 엄마는 그 뒤로 더 열심히 일을 했다.
민정의 나이에 이런 고생을 하는 집도 있을까.
민정은 늘 궁금했다. 나처럼 살아가는 10대가 있을까.
민정의 눈에는 같은 반 친구들이 모두 부자로 보였다.
그들은 매일 간식을 사 먹었고 주말이면 모여 놀았다
엄마는 몇 년 전 암으로 돌아가셨다.
민정은 이를 악물었다. 잘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엄마는 암에 걸릴 걸 알았을까. 보험금 1억이 나왔다.
그걸로 엄마의 병원비를 냈다. 그걸로 부모님이 남긴 빚을 갚았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민정은 방을 얻었다. 보증금 3천만원에서
그들이 뜯어간 6백만원은 민정에게는 피같은 돈이었다.
휴...
한숨을 길게 내쉬고 민정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했다.
문득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뭐가 이렇게 힘들지.
왜 이렇게 힘들지. 왜 날이 갈수록 더 아프지.
"아프면 아프다고 해. 왜 넌 아프다고 말하지 않아?"
바보. 아프다고 말하면 더 아프다.
꼭꼭 묻어 두었던 아픔들이 그리고 슬픔들이
막 터져 나오면 어떡해.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