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길을 걷다(1)

아주 오랜 이별

by 리뷰몽땅

1.

늦은 밤 그의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을 깬다 아이는 여전히 내 옆에서 잠들어 있다 술에 취했지만 오늘은 정신이 맑아 보인다

놀랜척 쇼하지 마라

그는 나에게 늘 그래왔다.내가 놀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면 쇼하지 말라고 했다

내일 떠나줄게..그러니 오늘은 내가 아이와 잘 수 있게 해주라.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나는 말없이 베개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그 베개를 껴안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게 떠나달라고 애원했던 시간들이 마치 하얀 종이처럼 투명해진다.드디어 내일 그가 떠난다. 내 인생에서 그의 자리를 지워버릴 수 있게 됐다.날이 새기만을 기다리다 새벽녘에야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여전히 무더운 아침이다

나는 서둘러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 마지막 날 아침을 함께 하고 싶다는 섣부른 감성. 툭툭..그의 어깨를 슬며시 친다 깜짝 놀란 그가 벌떡 일어나 부릅뜬 눈으로 나를 본다 그래 마지막 밥상은 지나친 감성이었다 아무 말 않고 다시 아침 식탁으로 돌아와 갈팡질팡 한다 국을 떴다 부었다 밥을 펐다 말았다 하기를 여러번 잠에서 깬 아이를 씻기고 미장원으로 데리고 간다 그 동안 그는 짐을 챙겨 나의 집에서 떠날 것이다 두어 시간 미장원에서 시간을 보낸 후 나는 아이에게 설명해야 한다 이제 아빠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눈물 없이 말할 수 있을까 울지 않아야 한다 갑자기 눈물이 흘러 내린다 아무것도 없이 떠나야 하는 그가 불쌍하기도 하고 그렇게 보낼 수 밖에 없는 나의 지독함이 무섭기도 하다 이제 우리의 싸움이 여기서 끝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갈곳도 없는 사람을 그렇게 쫓아낼 수가 있어요? 그러고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독하다 독하다 했지만 이렇게 독할 줄 누가 알았겠냐구요 어디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봅시다

싸우지 말자 싸워서 이겨본 적 한번 없는 내가, 이제 와서 싸운다고 무슨 득을 볼것인가. 조용히 전화기를 내려 놓는다, 피해자는 늘 마지막에 당하는 사람이 되는 거다.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법이다. 사람들은 늘 결과를 본다

그 결과 지금 나는 이 집에 남아있고 그는 쫓겨난 것과 다름없다.그에게 남아있는 건 분노와 찢겨진 자존심..그리고 나에 대한 복수. 그리고 나에게 남아있는 건 몇날며칠 모자랐던 잠...자야겠다 자야한다. 내일까지 세상이 온통 어둠에 쌓여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2.

선배..나..선배..좋아해요..알죠

동갑내기 후배 승훈을 만나건 대학 2학년 동아리 신입생을 모집하면서부터다, 오토바이를 타고 온 승훈은 신입생들 사이를 비집고 굳이 내게 말을 건넨다.첫인상이 꽤나 독특해 한번 본 승훈의 얼굴을 나는 잊지 않는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신입생 모집에 혈안이 되어 있는 내게 승훈은 어김없이 나타나 자판기 커피를 내민다.1년의 동아리 생활동안 승훈은 언제나 내 편이다. 그래서 나는 승훈을 좋아한다 남자로서가 아니라 동료로서. 승훈이 옆에 있으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이 된다. 말수가 적은 승훈은 아침 등교길에도 밤늦은 귀가 길에도 늘 내 옆에 있다.

나 군에 가요..근데 말하고 싶었어요..선배..나..

승훈아..나 그냥 너 선배할래..그렇게 할 수 있게 해줘.난 그냥 지금처럼 승훈이 너 선배 할래..

승훈이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나의 학교 생활은 정말 재미없다. 가끔 생긴 남자 친구들이 내 귀가길을 지켜주어도 승훈이 만큼 편안하지 않다.나는 승훈에게 편지를 쓴다. 승훈도 나에게 답장을 쓴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선후배이다. 승훈은 내가 부탁한 일을 섭섭할만큼 철저히 지켜나간다. 휴가를 나온 승훈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승훈을 만나기 위해 나는 아침부터 옷을 갈아입고 또 갈아입고 또 갈아입는다. 눈썹을 열번도 넘게 고쳐 그린다. 입술을 열번도 넘게 고쳐 바른다.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지만 승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 바지 주머니에 한쪽 손을 꽂고 왼쪽으로 한바퀴 오른쪽으로 한바퀴 그렇게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나는 그런 승훈이 좋다

선배..너무너무 외로우면 나한테 말해요..난 항상 선배만 보고 있을테니까..남자친구 백명만 사겨보고 그래도 맘에 드는 놈 없으면 그때는 나한테 넘어오는 거예요..

백명을 사귀기도 전에 나는 그를 만난다어딘가 외로운 구석이 많아보이는 사람..늘 무언가 모자라보이는 사람..만난지 석달도 못돼 나는 그와 결혼한다. 신혼여행에서 다녀온 지 하루만에 그는 나에게서 용돈을 받아간다. 그 용돈으로 친구들을 만나고 술을 마신다. 용돈이 떨어지면 그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본다.나는 일을 한다. 나는일을 한다. 몇년을 잊고 살았던 승훈이 불쑥 생각난다

선배..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승훈아..밤공기가 좋다..

나는 힘들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죽고 싶을만큼 힘이 들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새벽 세시 그렇게 아무말도 없이 시간을 흘려 보낸다.

선배..자요..자야돼..잠꾸러기잖아요..어서 자요..어서..

아..나는 그런 승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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