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위한 만남
3.
정말 내가 죽든 그 인간이 죽든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끝날거야.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
그녀는 학습지 선생님이다 아이의 수업을 맡게 된 그녀와 처음 차를 마셨다. 그 후로도 그녀는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다거나 하면 나의 집을 찾았다.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렇게 우리는 친구 아닌 친구가 되었다. 맘속 이야기를 잘 털어놓지 못하는 나와 달리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이야기를 쏟아낸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의 투정은 때로 자랑처럼 들리기도 한다. 한참을 떠들고 나면 겸연쩍은 듯 씩..웃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마주 본 그녀의 얼굴은 활기있어 보이지만 돌아선 그녀의 모습은 한없이 처량하다. 때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로 손이 간다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그 놈의 개새끼 때문에 내가 정말 미치겠다니까. 아니 울 집 개새끼 말고 내가 수업나가는 집 개새끼 말이야. 얼마나 큰지 자긴 못봐서 몰라. 그런 놈이 대문앞에 붙어 서있으니까 너무 무서워 죽겠어. 아무리 묶여 있다고는 하지만 언젠가는 그 개줄을 끊어버릴 것 같아. 뭔놈의 개줄은 그렇게 긴지. 그 집 들어갈 때마다 애 엄마가 나와서 개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니까
그는 취직을 한다. 그의 수입은 얼마되질 않지만 낮시간 동안 그가 집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살것 같다. 그는 매일 새벽녘에 집에 들어오거나 아예 집에 들어오질 않는다. 나는 전화를 한다 왜 오지 않느냐고 언제 올거냐고. 하지만 그 전화는 아무도 받질 않는다 . 그의 전화는 내가 걸때에만 늘 전파방해를 받는다. 그와 나 사이에도 어떤 보이지 않는 전파 방해가 있는건 아닐까. 나는 아이를 키우며 집에서 수업을 한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내 집을 살 수 있을것 같다. 아이가 더 크기 전에 더 빨리 집을 마련하고 싶다. 나는 매일 새벽 홍보용 전단지를 만들어 대문 앞에 붙이고 다닌다. 15층짜리 아파트 계단을 뛰어내려가며 10개동을 붙이고 오면 온 몸은 녹초가 된다. 그래도 나는 붙이고 다닌다. 돈만 더 모으게 된다면 그와 나 사이의 전파방해는 말끔히 제거될 것 같다. 이른 새벽 갑작스런 배의 통증을 느낀다. 계단을 내려설 수도 없다 전화를 건다 그는 받질 않는다. 다시 그와 나 사이에 생긴 전파방해. 나는 이를 악물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배가 찢어질 것 같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대로 자리에 눕는다 아이는 잠들어 있다. 병원엘 가야 한다 아이는 잠들어 있다 남편은 전화를 받질 않는다
원래 몸이 좀 약한데다가 좀 무리하신것 같은데요..몇일 쉬시다 퇴원하시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혼자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병원문을 나선다 . 입이 쓰다 뭐라도 먹어야 한다 근처 식당문을 밀고 들어선다. 뚝배기에 담겨 나온 순두부 찌개를 입안에 넣자마자 바로 뱉어내 버린다. 혀로 입안을 훑어본다 온통 헐어있는 입안에 매운 찌개를 밀어넣다니
바보 같은 년 뱃속 아기도 지켜내지 못하는 바보 같은 년.. 지 입안이 헐어있는 줄도 모르는 바보 같은 년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매운 찌개를 다시 입안으로 밀어넣는다
너 같은 년은 매운 맛 좀 봐야 돼..바보 같은 년..바보 같은 년..지 자식도 지키지 못하는 바보 같은 년
꾸역꾸역 밥을 먹다가 나는 다시 전화를 건다. 도대체 어디 있는거냐고 그가 묻는다. 아이는 어딨는거냐고 그가 묻는다
야 이 개새끼야 넌 머하다 이제 들어온거야. 마누라가 없으면 자식이 없으면 전화부터 해야지. 도대체 넌. 너라는 인간 정말 싫다
갑자기 개가 달려들었대요. 늘 줄에 묶여 있는 개라는데. 2층 계단에서 내려오시다가 개가 갑자기 달려드는 바람에 피하다가 굴러 떨어지신 거래요. 그걸 다시 개가....사냥개라나봐요..그래서..
그 놈의 개새끼..는 보험금을 챙겨 떠난다. 아이들은 외할머니에게 버려둔 채로..늘 줄에 묶여있던 그 개새끼말고.. 그녀 집에서 그녀를 힘들게 하던 그 개새끼가..묶어두어야 할 건 그 개새끼였나보다..아이들이라도 데리고 가지..아이들이라도..나는 다시 홍보 전단지를 들고 이른 새벽녘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내려가고 거리를 뛰어간다
개새끼들은 다 죽여버려야 돼..개새끼들은....
4.
이사 했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멀리도 왔다..그래도 우리 벌써 선배 후배 한지가 얼마나 되는데 그렇게 말도 없이 가요? 정말 사람 좀 그러네
뭐하러 왔어? 안 바쁜가봐..요즘
무지 바빠요..먹고 살려면 안 바빠서야 되겠어요? 근데 살이 좀 많이 빠진거 같다 다이어트 해요? 하지말지 안해도 되는데
왜 안 해도 돼 날마다 늘어나는건 옆구리 살이랑 뱃살 밖에 없어. 그냥 보면 말라보이지? 감춰둔 살들이 얼마나 많은데
....괜찮은거예요?... 선배..나 걱정 많이 했어..내가 뭐라고 걱정까지 할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는데..그냥 많이 궁금하고 많이 ....보고 싶었어요
뭐하러 걱정하고 보고 싶어? 야..박승훈!!! 나 니 선배거든..너 내가 요만할때부터 키웠던 거 생각안나? 처음 신입생 때 기억 안나? 아무것도 모르는 너 델고 다니면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승훈을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으며 얼마나 기뻤는지 나는 말하지 못한다. 너를 다시 만나 내가 얼마나 기쁜지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도 말하지 못한다나는 피자헛에 가서 토핑 가득 얹은 피자를 먹고 싶다고 말한다. 오랫만에 피자를 먹으며 나는 다시 지난 시간들을 떠올린다. 삶이 힘들어지면 사람은 누구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 시절 그 어느 시간부터 다시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어한다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어느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걸까
그리고 다시 내게 선택의 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근데 너 왜 나 결혼할 때 안온거야?
그는 말을 잇지 못한다 나도 그의 어떤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다. 다만 침묵이 주는 시간들을 견디지 못할 뿐이다. 침묵 속에서 승훈이 보는 나의 얼굴이 더 이상 비참하거나 슬퍼보이지 않길 바랄 뿐..정말 그가 왜 오지 않았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바보야..살만 하니까 사는거야..아직은 서로 맞춰 나가야 할 시간이 필요한것 같아..하긴 ..우린 너무 빨리 모든걸 결정해 버렸어.. 그래서 아직은 서로 익숙해지고 있는 과정인거야. 새로움..이 주는 여러가지 낯선 사건들을 아직 걸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구. 승훈아..너 이 선배 잘 알지?? 나..싫은일 잘 못하는거 알지?? 그런거야..너무 싫었으면 내가 이러고 살 것 같아? . 그러니까 제발 너 그런 눈으로 좀 쳐다보지 마. 불쌍해 죽겠다는 그런 눈 말이야..나 무지 기분 나빠..나 자존심 상한다구..
여자들은 다 그래요? 결혼하면 다 그렇게 변해요? 그냥 옛날 선배 모습이랑 지금은 잘은 모르지만 뭔가 많이 달라져 있어요. 선배 눈동자..그 눈동자가 많이 달라져 있어요. 늘 뭔가를 찾던 그 눈..나..그 눈이 정말 좋았어요..
이상과 현실은 다른 거니까..책 속에서 읽던 사람들의 모습과 내가 살아가면서 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 다른거니까. 전에 울 선배중에 한 사람이 그랬잖아 너 그 선배...알아..? 지영이 선배..내가 무지 좋아했었는데..그런데 그 선배가 나한테 그랬어..넌 온실 속의 화초일 뿐이라고..네가 아는 세상 속에서만 넌 웃고 있는 거라고..
그 말..맞았던 거 같아..난 그냥 내가 아는 세상 속에 갇혀서 세상을 보려고 한거야.. 사람은 마땅히 이래야 하고..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하고..이럴땐 이렇게 저럴땐 저렇게..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살면 다 잘 살게 되어 있는거라고.. 그런데 내가 아무리 그렇게 살아도 잘 살아지는 건 아닌거 같아.. 세상은..도덕 교과서가 아니거든.. 난..지금..치열하게 세상을 배워가는 중이야.. 나..잘 할거야..나..한다면 하는거..너도 알잖아..잘 할거야..
휴지 아무데나 버리기 않기. 잔디 밟지 않기. 공공장소에서 소리 지르지 않기. 노인 공경하기. 부모님 말씀 잘 듣기. 나쁜 말 하지 않기. 한 줄 서기. 거리에 침 뱉지 않기.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살아온다. 그렇게 살면 정말 잘 살 수 있을거라 믿으면서..하지만 나 혼자 그렇게 살면서 나만 바보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상대방에게 지켜야 할 예의 따위는 원래부터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살고 싶은대로 살아버리면 된다. 나도 그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부터 나도 나 하고 싶은대로 살아버리면 된다. 다만 너무나도 당연하게 믿고 살았던 그 도덕 교과서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선배..나 밤잠 없는거 알죠? 그래서 밤에 무지 심심한거 알죠?
그는 나한테 전화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승훈이 좋다...그냥..좋다
6.
무관심..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사람이 일을 대할 때..무관심 만큼 나쁜 일은 없다는 것을 나는 그때는 알지 못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그냥 모른척 놔두면 더운 여름날 오후 녹아 사라지는 아이스크림처럼 그렇게 사라질 줄 안다. 뒤늦게서야 알게 된 그의 엄청난 빚들. 연달아 날아오는 독촉장들
언니 나도 결혼해서야 알게 된걸요. 우리 신랑이 신용불량자인지. 아무리 열심히 벌어도 그 사람 빚 갚고 나면 우리한테 남는게 없어요. 이래뵈도 나 옛날에는 잘나갔다니깐요. 얼마나 날씬했게.지금은 이렇게 막 굴러다니는 몸매지만. 그래도 이 사람..나한테 너무 많이 미안해하고. 안하는 일 없이 열심히 뛰어다니니까.그걸 위안삼아 사는거지 머 별수 있어요. 그래도 언니.난 정말 너무 슬퍼. 울 동민이 더 비싼 분유 사주지 못했던것도 슬프고. 더 좋은 기저귀 못 차게 한것도 슬프고. 남들 다 가는 놀이공원 못가보는 것도 너무 슬프고. 젤 슬픈건 시집식구들은 암만해도 이 사정을 모른다는게 젤 슬퍼. 시댁 행사때 빈 손으로 가면 막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난 정말 너무 슬퍼. 그래도 언니는 나한테 비하면 좋은거지. 언닌 그래도 벌이가 만만치 않잖아. 내가 언니만큼 벌면.정말 그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호호호. 그래도 얼마전부터 신용불량자회생 어쩌고 해서.나가는 돈이 팍 줄어서. 그나마 다행이야.이번주에는 셋이서 롯데월드 갈려고.
대출에 대출을 거듭해도 그의 빚은 자꾸만 불어난다. 그의 빚이 불어나면서 나의
빚도 불어난다. 그가 파놓은 구렁텅이로 나도 같이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당신은 나보다 강하잖아. 훨씬 더
나는 강한게 아니야..난 그냥 쓰러지는 방법을 모를 뿐이야..
그래도 다행인가 그에게 일할 곳이 남아있다는 것은. 그는 도망치듯 중국으로 가버린다 행여 그를 놓칠세라. 나도 정신없이 그를 따라간다 차라리 놓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미...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