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길을 걷다(3)

이별을 위한 이별

by 리뷰몽땅

7.

가볍게 울리는 전화벨소리. 아침부터 좋은 모습 보이고 나온게 아니라 애써 전화를 피해버리려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뭐해?

여기 학원.근데 왜?

나.있지.아니다.있다 다시 전화할게

목소리가 왠지 심상치 않다.중국 생활도 이제 익숙해 지려는가보다. 그의 수입만 믿고 덜컥 따라온 이 곳 생활은 첨부터 그렇게 쉬운 건 아니다. 한국인들이 사는 곳과는 좀 떨어진 아파트. 고립된 생활이 주는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단 하루도 넋놓고 있을 수가 없다. 아침 일찍 그와 아이를 배웅하면서 나도 서둘러 학원으로 나온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기 무섭게 경제적인 궁핍함이 나를 또 다시 내몬다. 그는 나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고 나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본다. 결국 6년동안 들어두었던 보험을 해약한다

그 날 그와 아이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비싼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나는 학원 동료 선생들과 술을 마신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며 그냥 웃는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가슴이 답답하다. 말리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택시를 탄다. 택시에서 내려 불빛도 없는 거리를 뛰다시피 걸어 4층 계단을 올라간다. 술에 얼근하게 취한 그와 아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보험을 해약하고 나온 돈으로 그는 급한 불을 껐을테다. 그리고 오랫만에 편한 맘으로 아이와 함께 밥을 먹었을테다

다음엔 무얼 해약해야 하나? 이제 내게 남은거라곤 집 한 채 뿐이다. 절반 이상이 대출에 묶여 있는 집. 아무리 헤어나오려 해도 헤어나올 수가 없다. 며칠 후 이번에는 집을 팔자고 한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건지 이해라도 해보라고 말한다. 그럴수 없는 내 마음을 그는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집을 얻기 위해 나는 두 명의 아이를 보내야만 했다. 내 몸속에서 죽어나간 두 생명과 바꾼 그 집을 팔 수 없는 내 마음을 그는 이해할 수 있을까?

다시 싸움이 시작된다. 그는 며칠째 돌아오질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질 수 없다.이번에는 이겨야 한다 이번에는

정말 연락이 없습니까..서울에서 사장님도 들어오셨는데..

일단 사장님이 좀 뵙자고 하는데..회사로 좀 나오셔야겠습니다.

그와 함께 다니던 중국인 기사가 한국인이 드문 우리집에 나를 데리러 온다. 조선족 아주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너무 울어 퉁퉁부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채 나는 그의 회사로 간다. 그가 없는 사무실에는 서울에서 온 사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빚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느냐

빚 독촉을 심하게 받은것 같다

회사 돈도 장부와 맞질 않는다 혹시 연락이 오면 나한테 연락해달라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걱정말라 우리도 공항에 이미 연락을 해두었다 찾게될거다

아무일 없을거다

나도 알고 있다 그에게 아무 일 없을 거라는 것쯤은. 낯선 외국땅에 나와 아이만 남겨두고 떠날만큼 상황이 급박했던걸까? 내 수중에 남아있는 돈은 겨우 3천위엔

숨이 막힌다.숨을 쉴 수가 없다. 머리가 아프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

그의 집에 전화를 건다 그리고 나는 다시 혼자다

아 어마이..울자마.. 내 아 어마이 심정을 다는 몰라도..어느 정도는 안다고 보지..우리 아 아바이도 여러번 사람을 애 먹인게 아니라 말이지.. 아 또한 그렇지비.. 얼마전에는 칼을 들고 학교에서 난동을 부렸기로.. 내 학교까지 다녀오지 않았음매.. 아무일 없을기라 믿으라.. 지금 이렇게 넋놓고 앉아서 울지 말고..먼가 대책을 세워야지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거 아닌가.. 내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한국으로 돌아갈 돈이 없으면 나한테 얼마간의 돈이 있으니.. 그걸 가지고서라도 일단 한국으로 가야하지 않겠음.. 아 어마이 내 돈 갖고 떼먹을 사람 아닌거 내 알고.. 그동안 내가 이 집에서 일한거 없이 돈 받은것도 내 다 안다이.. 일하는 사람한테 언니라 불러준 것도 내 너무 고맙고.. 보통 한국사람들 우리 조선족들 얼마나 무시하는데..

날 친언니처럼 대해준 아 어마이한테 내 그정도도 못하문 내가 인간이 아니지..

밤늦게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사장이 알면 나를 보내지 않고 잡아둘까 두려워 나도 도망치듯 그 곳을 떠나온다. 내 몸집의 세배나 큰 가방 두개와 아이를 데리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공항까지 따라나온 조선족 아주머니에게 그곳에서 쓰던 휴대폰을 선물로 준다

줄게 이것밖에 없어요 담에 내가 다시 오면 연락할게요

8.

어머.집 좋다.당신 부자 됐네.악착같이 벌더니 잘됐다.

이건 가족 사진이야?

별 중요하지 않은 모임에서 만난 그녀는 날 보자마자 기도를 한다며 손을 잡는다. 얼떨결에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 그녀가 기도를 하며 운다

왜 울어요?

그냥 그녀는 운다

당신 정말 힘들어.너무너무 힘들어.

나는 그런 그녀가 무섭다 그녀를 피하고 싶다. 그녀가 나를 찾아온다 전화를 걸고 물어물어 집으로 온다. 반갑지 않은 표정임에도 스스럼없이 집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이곳저곳 살펴본다

당신.힘들어..힘들겠다.당신이랑 맞는 얼굴이 하나도 없어. 당신 시어머니.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이겨.아예 포기해.

도사도 아니면서 어떻게 얼굴만 보고 알아요..그런분 아니예요..

남의 눈에 내가 불행해 보이는건 싫다. 나는 무조건 행복해 보이기를 바란다 . 그래서 나는 그녀가 싫다. 다시는 내 집에 오지 못하게 할테다.

걱정마.새댁은 펜대만 잡고 있으면 굶어죽을 걱정은 없어. 평생 못먹고 살일은 없어.그런데.새댁 남편.그게 문제네. 기계를 만지면 나을까.새댁이랑 너무 안맞다. 그래도 새댁이 델고 살아야해.어쩌겠냐.

잠시 화장실 좀 쓰자던 약 판매 외판원은 화장실에서 나와 물을 마시며 다시 가족 사진을 보고 말한다. 내 손금을 보고 내 관상을 보고 그리고 어김없이 똑같은 말을 한다

힘들어도 참아.새댁. 근데 너무 말랐네.이 영양제 먹고 힘 좀 내야겠어.

외판원이 내민 약을 겁도 없이 산다

그 약만 먹으면 힘이 나요?

아이.더 힘내려면 이것도 좋지.이것도.이것도.

그녀가 내민 다섯 가지 종류의 약을 나는 모두 산다. 그 약을 먹으면 나는 힘이 난다고 한다..힘이..

난 말이지..이 두 구멍이 문제라고 했어. 위에 있는 구멍..밑에 있는 구멍..그것만 조심하면 사는거 문제 없을거래.. 그런데 난 이 두 구멍으로 사는거 같아.. 이거 없었으면 난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지.. 남편??? 그게 뭔데??? 첨부터 남이잖아..멀 기대하고 살아.. 바보도 아니고 숙맥도 아니고..그걸 믿어?? 차라리 하룻밤에 날 흥분으로 몰아넣은 어제 그 남자를 믿지.. 자기..힘들지..하지만 자기..이혼은 하지마라..자기는 이혼 하면 안돼.. 그리고 자기..남편..그거 믿지마..그건...믿으면 안돼...

중국에서 함께 수업을 하던 그녀가 말한다. 난 그에 대해 단 한번도 말한 적이 없다. 그녀는 그를 단 한번 학원 앞에서 만난게 전부다. 나는 이 여자가 싫다..매일 나를 꿰뚫어보듯 말하는 그녀가 싫다. 그녀는 매일 내 주변을 맴돌고 나는 매일 그녀를 피해다닌다. 그녀는 나를 처량하게 바라본다. 싫다..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가 정말 싫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보다. 어쩌면 그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위안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놓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나는 보여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내 자존심이 깡그리 무너질까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힘들어 보이는 시간들도 결국 나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매달리고 있는 건지도...

9.

그만 하자. 우리..

당신도 나도 너무 힘들다..

어제 같은 일이 벌써 몇 번째인지..

당신 기억 속에서는 지워질지 몰라도 내 기억 속에서는 지워질 수 없을 것 같아..

씨팔..쇼하지 마라

여자 혼자 세상을 산다는게 뭐 그리 쉬운 일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고.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 까짓거 사는건 다 똑같은 거 아니야? 지지고 볶고 매일 들러붙어 싸우고 산지가 벌써 몇 년이야. 이럴거면 차라리 그냥 나 혼자 살자 싶었지. 옆에 붙어 있는 새끼는 지 욕심 채우면 혼자 널부러져 자는건 허다한 일이고. 그 새끼가 내 옆에 있다고 해서 돈 걱정 시키지 않는 것도 아니고. 노래도 있잖아

밤이면 밤마다 님 모습 떠올리긴 싫어. 나도 그랬어 진짜 욕나올 판이었다니까 . 그 가사가 그 의미가 아니면 어때 . 딱 그 구절이 내 맘인걸. 어딜 가서 며칠씩 집에 안들어오다가 갑자기 들어와서는 미친 놈처럼 더듬어 댈 때는... 난 인간도 아니야 어떻게 그게 인간이겠어. 근데 이상한 건 말이지, 난 거부를 못했다는 거야. 그게 저항하지 못하는 건지 그냥 그렇게 익숙해져 버린 건지. 도대체 나도 모르겠으니까

여하튼 그러고 사느니 헤어지는 게 백번 낫다 싶었어. 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망설일게 뭐 있어. 그런데 그 새끼 말이지 절대 못 헤어진다고 날 잡고 늘어질 줄 알았는데. 얼마나 자존심 상했는지 알기나 해? 차라리 못 헤어진다고 잡고 늘어지기나 했으면... 아직도 난 그래. 그 새끼 왜 그렇게 날 쉽게 놔줬을까? 내가 그 새끼 용돈까지 다 대주고 지냈거든. 우린 호적상 부부만 아니었지 진짜 부부처럼 살았거든. 그러니까 그 새끼가 날 쉽게 놔준건 다 그 빌어먹을 호적이란거지. 아니라도 하는 수 없어 난 그렇게 믿을테니까. 안 그러면 내가 미칠 것 같아.

근데 이 나이에 여자 혼자 산다고 별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이 무시한다 이거야

혼자 살려면 돈이라도 있어야지, 그것마저 없이 혼자 사니까 마구 덤벼들어. 남자들은 내 몸에 덤벼들고 여자들은 내 맘을 할퀴고...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것도 익숙해 지기는 하는거야. 다만 자꾸 내 가슴이 허하다는 것 밖에... 돈..역시 돈이야..돈만 있으면 그것들이 날 함부로 보겠어?

시장 어귀 골목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반찬가게에서 주인과 한 여인이 하는 말을 듣는다. 나는 추어탕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오다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누군가가 몹시 그립고 목이 메이게 불러보고 싶다. 오른손으로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을 슬쩍 위로 밀어 올리고 승훈의 전화번호를 누르려다 만다. 이제 와서 내가 승훈에게 무엇을 더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승훈을 미치도록 사랑하고 싶다. 내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릴 만큼 사랑하고 있다면...그럴 수만 있다면

10.

차라리 말을 하지. 첨부터 힘들었다고 말을 하지. 이제까지 아무말도 안했잖아. 한번도 힘들다고. 씨팔. 안되는걸 어떡하냐. 아무리 애써도 안되는걸 어떡해. 여자보다 더 능력 없는 놈이라는 소리 듣고 사는 내 맘은 편한줄 알아? 나도 좋은 남편 소리 듣고 살고 싶어. 나라고 그런 생각도 안하고 살줄 알았니. 술. 그 술 때문에 못 살겠다고. 돈이 아니라 술이라고? 씨팔.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 돈이지. 돈. 내가 아무리 술을 퍼먹고 다녀도 돈만 벌어다주면 남들처럼 펑펑 쓸만큼 벌어다 준다면 참고 살거 아니었어?

까짓거 벌어다 줄게.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벌어다주면 될거 아니냐. 아니면 너 보는데서 콱 죽어버릴까. 그래. 죽자. 그냥 다같이 죽자. 그럼 되는거 아니냐. 죽을만큼 힘들다며. 얼마나 힘들면 죽을만큼이니. 나보다 네가 더 힘들다고? 그래. 집도 네거고 차도 네거고 다 네건데 도대체 머가 힘들어. 왜. 이제 내가 귀찮아졌냐. 그런거지. 씨팔.

나도. 숨 쉬면서 살고 싶어. 나도. 이제. 살고 싶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마음 졸이면서 사는거 그만하고 싶어. 그냥 내일이 올까 두려워하면서 사는거 그만하고 싶어.당신이 싫은게 아니라. 당신이 무..서..워

그러니까 앞으로 잘 한다고 하잖아. 막말로 도대체 네가 한게 뭔데? 돈? 그거 너 위해서 벌었지 그게 날 위해서 한거냐? 탁 까놓고 말해서 다 너 위해서 그렇게 산거 아니야? 네가 무슨 테레사 수녀라도 된다고. 네가 날 위해서 산것처럼 말하는데 웃기지 마라.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될 거 아니냐고. 왜 내 탓인데. 왜 나만 잘못한건데. 내가 왜 술 마시고 다녔겠냐. 니가 한 순간이라도 사람 맘을 편하게 해줬어봐라. 내가 그러고 다녔겠는가. 그리고 말 나온김에 한마디 더 하자. 내가 밥벌이 못 한다고 니가 우리 식구들은 또 얼마나 무시했는데 이제 와서 그런 적 없다고 발뺌하면 그게 없는게 되냐.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라. 여자가 그딴 식으로 나오는데 어느 남자가 맨 정신으로 살겠냐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 끝내자는거야. 당신 말대로라면 난 정말 나쁜 여자니까. 그러니까. 끝내자..

씨팔. 그러니까 끝내자고? 못 끝낸다. 내가 왜. 죽어도 그렇게는 못해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누구나 더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는 나를 외면하고 나는 그런 그를 잡고 애원한다. 그와의 시간을 끝내버리면 모든게 해결이 될까. 과연 그럴까. 또 다른 의구심이 맘 속에서 소용돌이 친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이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닐까. 그가 싫었기 때문에 그의 부모도 그의 가족들도 싫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 겉으로만 돌았던 건 아닐까.

하지만 그와 나는 몇 번이나 다시 시작하기 위해 노력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편지를 쓴다. 매일 술에 취해 있는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몰래 편지를 쓰고 잠든 그의 머리맡에 몰래 편지를 놓아둔다. 늦은 아침 햇살에 눈을 뜬 그는 애써 그 편지를 무시하고 애써 내 눈길을 피하고 애써 태연한 척 집안을 휘젓고 다닌다. 나는 그가 일어나기 전에 부리나케 가방을 챙겨들고 집을 나선다. 마치 전선의 밤을 떠올리듯 살얼음판을 딛는 듯한 밤이 지나간다. 그와 모든 걸 끝내고 싶어하는 나와 모른척 그대로 묻어두고 지내고 싶은 그와의 전쟁.

술에 취한 어느 날 그는 또다시 소리를 지르고 방문을 두드린다. 아이의 귀를 틀어막고 나는 문을 잠근 채 꼼짝 않고 문만 노려본다. 다시 악몽이 시작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가 제풀에 꺽여 그냥 잠들어주기를 바란다. 아이의 방에서 좌식의자를 꺼내들고 그가 문을 향해 집어던진다. 아이는 잠에서 깨어나 소리를 지르며 운다. 그와 아이의 울부짖음으로 나는 두려움이 극에 달한다. 내가 다시 저 문을 열고 그를 받아 들인다면.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상들이 다시 나를 붙잡을 테다. 그와 헤어지겠다는 다짐을 한 후로 두려움만큼 나를 에워쌌던 안도감. 저 문을 열면..열게 된다면..나는 사라지고 말리라

경.찰.서.죠?

어쩌면 처음부터 쉽게 끝을 낼 수도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와 관련없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냉철하게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을지라도 그게 나의 일이라면 무조건 긍정적이 된다. 다 잘 될 수 있을것만 같다. 이번 일만 지나면 모든 고비는 끝나버릴 것만 같은게 어쩌면 삶인지도 모른다. 매순간 절망하고 좌절하였다 하더라도 꿈같은 그 시간들이 다시 돌아와 줄 것만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결혼이라는 삶이 가져다 준 것인지도 모른다.

11.

선배. 어디예요?

여기 시장. 울 집 앞 시장. 지금 올 수 있어?

알았어요. 부근가서 전화 할게요.

이 기나긴 여름도 끝을 맺는다. 민소매 차림이 민망할 만큼 바람이 스산하다. 당근을 사고 양파를 사고 감자를 사고 시장에 오면 으레히 사게 되는 몇가지 야채들을 장바구니에 넣고 나는 어느 국밥집 가게 앞에 멈춰선다. 아주 작은 가게 밖에 내다놓은 가게만큼 커 보이는 가마솥에서 뿌연 연기가 솟아오른다. 큰 냄비를 들고 온 아주머니와 가게 주인의 짦은 실갱이 후에 아주머니는 흡족한 듯 냄비를 들고 시장 골목을 나선다. 혼자 들고 가기엔 정말 무거워 보인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챙겨야 할 가족이 있을테고 그것이 어쩌면 그녀의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국밥집 앞에서 승훈에게 전화를 건다. 바깥 바람이 조금은 시원해졌다 해도 국밥집 안은 열기로 가득하다. 에어컨 없는 식당이 없는 세상이지만 씩씩대며 돌아가는 선풍기 한 대만으로도 충분할 만큼 시장 골목 안 국밥집안에는 테이블이 달랑 두 개 뿐이다.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나는 돼지국밥 한 그릇을 시킨다. 처음에는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승훈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너무 배가 고파 국밥 한 그릇을 정신없이 먹는다. 생각해보니 밥이라는 녀석을 숟가락으로 퍼먹어 본지 너무 오래된 것 같다.

선배. 혼자서 뭐해요 지금?

왔어? 배가 고파서. 너도 먹을래? 맛있다.

국밥 집에는 국밥만 있는게 아니다. 승훈은 수육 한 접시와 국밥 한 그릇을 시킨다. 허겁지겁 먹느라 채 보지 못했던 메뉴판을 나도 슬쩍 훔쳐본다. 목 끝까지 알알하게 얼려주는 동동주.

승훈아. 나 저거 먹고 싶다. 목 끝까지 알알하게 얼려주는 동동주.

술?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왜 술을?

하여간 시켜줘봐. 오늘은 왠지 땡긴다. 그리고 너도 빨리 먹어. 안 먹을거야? 그럼 내가 먹을까? 그래도 되지?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죠. 무슨 일이예요?

야. 밥 먹잖아 지금. 밥 먹는데 무슨 일은 무슨 일. 일단 먹자. 아.동동주다. 나도 한잔 줘봐.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사람들이 없어서 못 마신다는 거야? 크. 시금털털하다. 이걸 뭔 맛으로 먹니? 그래도 목 끝까지 알알하긴 하다.

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가 남긴 국밥 몇 숟가락을 입에 넣는다. 나는 그런 승훈을 앞에 두고 수육을 보기 좋게 싸서 먹고 또 먹는다. 아무리 먹어도 며칠동안 허기진 배는 채워질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목 끝까지 알알하게 얼려주는 동동주를 다시 한 모금 더 들이킨다.

승훈아. 이제 여름도 끝나가려나봐. 그치? 우리 정말 오래 알고 지낸거 같아. 맞지.

새삼스럽게. 이래도 아직 얼마동안은 더 더울 거예요.

그래. 그럴거야. 그치? 그렇게 쉽게 모든게 사그라들진 않을거야. 여운이란거. 그게 좋은거든 나쁜거든. 여운이란거 그렇게 쉽게 사라지진 않을거야. 어쩜 평생 맘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 그럴거야. 이렇게 더운 여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와도 아주 더웠던 그 순간이 떠오르듯이. 그치?

무슨 일 있죠. 왜 그래요.

전화기 줘 봐. 좀 줘 봐. 잠깐만 머 좀 보고 줄게.

나는 승훈의 전화기를 집어들고 0번을 누른다. 승훈의 집번호. 1번을 누른다. 내가 모르는 승훈의 친구들. 2번도 3번도 내가 모르는 번호들.

야. 왜 내가 4번이야? 끔찍하게 왜 죽을 4야? 너 정말 실망이야. 어쩜.

그 4가 아니라 다른 4인데.

여하튼 무슨 4든 4는 기분 나뻐. 그래서 이건 삭제야.

어. 왜 그래요. 왜 번호를 지우고 그래요. 이리 줘요.

짜식. 놀래긴. 알았어. 그럼 공평하게 나도 지우면 되지. 자.봐. 됐지? 공평하지?

내 전화기에서도 그의 번호를 지운다. 승훈이 나를 본다. 나는 승훈을 보지 않는다. 나는 다시 수육을 한 점 쌈장에 찍어 먹는다. 아무 맛도 없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안에서 살살 녹듯 목구멍으로 넘어갔었는데. 승훈은 계속 나를 본다. 단 한번도 나에게 화를 내지 않던 승훈이 나를 노려보든 본다.

다 끝났어. 다. 이제 다 끝났어 승훈아. 옛날에 너가 나한테 말한 것처럼 잃어버린 내 눈빛. 어쩌면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 최소한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그런 눈빛은 아닐거야.

아니. 내 말 들어. 내 말부터 먼저 들어. 그래 맞아. 이혼했어. 오늘 서류 접수도 했고. 이제 다 끝났어. 아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는거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게 더 낫겠어. 근데 나 모든걸 다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데.

승훈아. 너가 자꾸 걸려. 그래서. 나 다 끝내고 몽땅 다 끝내야 될 것 같아서. 너도. 내가 너 잡고 있게 될까봐 무서워서. 그러면 내가 그러면 너도 우리 아들도 다 힘들까봐서. 아니 내가 그러면 너가 나 동정할까 봐서.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그냥 맴도는 널 보게 될까 두려워서. 아니다. 그게 아니라 그냥 전부 다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데 자꾸 니가 보여서. 그러니까

알았어요 무슨 말 하고 싶은건지 다 알았어요 그래서 오늘 나한테 전화 했구나. 그래서 오늘 술도 마시고. 말하지. 그냥 말하지. 나한테 그냥 잠시 모른 척 있어달라고 말하면 되지 왜 그래요. 그냥 선배 맘이 편해질 때까지 없는 듯이 살아줄게.그러면 되잖아요.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다 끝내 버릴 것처럼 말하는건 아닌거 같아요

승훈아. 그게 아니야. 이제 넌 너대로 난 나대로. 그렇게 모른척 살자.

왜. 왜 그래야 하는데요. 알았어요. 그럼 지금처럼 그냥 선배 후배 그러면서 지내면 되잖아요. 왜 무 자르듯이 그렇게 잘라버리려고 하는건데요. 정말 왜 그래요.

승훈아. 나 그냥 다 잊고 살고 싶어.

12.

미친년. 결혼하고서도 남자 친구 하나쯤은 갖고 사는 세상에 넌 뭐 잘났다고 목 메는 놈을 그렇게 매정하게 떼버리니? 너 미쳤니? 그런다고 누가 너더러 참 그 여자 양심적이다 머 그럴줄 알어? 아니 머 어때.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이혼녀면 어떻고 총각이면 머 어떠냐고. 좋다는데 그냥 당분간 두고 볼 일이지 머하러 그런 생쇼를 하는거니? 난 정말 너도 이해 못하겠지만 승훈이란 놈도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 정말 둘이 놀고 있네다. 놀고 있네야.

어쩌면 나는 미쳐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 결혼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믿게 되는 그 순간부터 어쩌면 사람들은 미친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미쳐 있기 때문에 내가 미쳐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채 살아가는 것인지도.

누군가의 손을 놓았다는 것과 놓쳐버렸다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다. 놓은 쪽도 놓쳐버린 쪽도 가슴이 허전한 건 매 한가지이며 시간이 지나면 그 허전한 가슴을 다른 것으로 메워 놓는 것도 매 한가지이다. 시간은, 세월은 그렇게 상처를 치유해가며 살도록 도와줄거라 믿는다.

어쩌면 나는 승훈에게 나라는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것이라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승훈에게 나는 사랑이 아니라 떼어버릴 수 없는 감정의 찌꺼기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아직 현실에 익숙하지 못한 승훈이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그게 아니라면 승훈과 나는 정말 서로에게 미쳐 있는 건지도. 그래서 나는 승훈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무엇이 사실이든 간에 남자와 여자 사이의 감정들에는 알 수 없는 묘한 일들이 늘 일어나게 마련인 것 같다.

그를 떠나보내면서 승훈을 곁에 둔다는 건 나라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쩌면 도덕적인 잣대가 나에게는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더 큰 상처를 안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승훈과 내가 넘어야 할 벽들이 한두가지가 아님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미리 그의 손을 놓아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승훈의 휴대폰에 저장된 단축번호가 사랑의 첫글자 4라고 우기더라도 4는 4니까.

어쨌든 나는 그렇게 바라던 모.든.일.들.을 끝.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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