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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뒹구리 Jan 26. 2021

​01. 미래의 나보다 지금의 나

YOLO 였던 내가 결혼하고 나서 겪은 이야기

집뒹구리 이야기


01. 미래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좋아!

YOLO였던 내가 결혼하고 나서 겪은 이야기




  나는 20살이 되면서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일은 하고 돈은 버는데 모이는 것이 없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병원비로 나가고, 다시 어느 정도 모이면 사고가 나서 돈 쓸 일이 생겨버렸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허무했다.


  모으지도 못하고 모이지도 않아서 그냥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모두 써버렸다. 지금 내가 아끼고 지켜서 모은 돈이, 내가 생각하지 못한 곳에 사용되니 억울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짜증이 났고, 돈을 벌면 버는 대로 지금의 내가 즐거운 곳에 돈을 썼다. 어차피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보다 지금의 내가 즐거운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살던 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나와 생각이 아주 많이 달랐다. 지금 돈을 모으지 않으면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는 남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루하루 재미있게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내 마인드로는 미래의 내가 그려지지 않았다. 미래의 나보다는 지금의 내가 더 중요했다. 앞으로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YOLO로 살던 습관은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것을 먹어야 했고, 갖고 싶은 것을 가져야 했다. 한 번 갖고 싶다고 생각한 물건이 있으면 어떻게든 샀다. 2년마다 새로 출시되는 아이폰을 사고 아이패드를 지르고 좋아보이는 물건들을 구매했다. 많이 버는 것은 아니었지만, 둘이 살면서 둘다 돈을 버니까 소비를 하면서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다음 달에 월급이 들어올 것이니,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삶은 아주 즐거웠다.


첫째


  첫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었다. 그 후 남편 혼자 버는 월급으로 생활을 해야 했다.


  남편은 대학교 4학년 2학기에 조기취업으로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그 회사는 직원이 3명인 디자인 회사에 다녔었는데, 그 당시에 월급 120만원을 받았다. 거기에 내가 벌어오던 적은 월급마저 사라지니 생활비가 많이 부족했다.


  입덧으로 먹고 싶은 것이 있지만 먹지 않았다. 계속해서 생각이 나고 먹고 싶어 지면 참고 참다가 한 번 먹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생활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생활비는 남편이 토요일도 없이 새벽 2-3시가 넘어 퇴근하고 다음날 8시에 다시 출근해서 벌어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 것을 알기에 남편이 벌어온 돈을 쉽게 쓸 수가 없었다. 


  우리의 생활을 위해 혼자 힘들어하는 남편의 모습이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집에서 무엇이라도 해보자고 부업을 알아보았다. 내가 알아본 곳들은 모두 초기 비용이 있었다. 나도 그 업체를 믿을 수 없지만, 업체에서도 나를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내가 일을 잘 하는지도 모르고, 재료를 받고 일을 안 해버릴 리스크가 있다고 했다. 그들이 하는 말도 이해가 되었고, 초기비용이 있더라도 더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여러 곳을 알아보다가 한 곳에 전화를 했다. 그 분은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1~2주 샘플을 해보고 나서 일거리를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일단 재료를 보내 줄테니 재료비 30만원을 보내라고 했다. 돈을 보내고 나면 바로 할 일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남편과 의논해볼 생각도 못하고 바로 일을 준다는 말에 돈을 송금했다. 송금한 후 바로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음만 한없이 흘러나왔다. 방금 전까지 통화를 했던 번호인데 몇 번을 걸어도 신호음만 나오더니, 결국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멘트가 나왔다. 당했다! 라는 생각과 함께 눈물이 났다. 내가 얼마나 간절했는데! 사람의 간절함을 가지고 저렇게 사기를 치다니!! 그날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저주를 그 사람에게 퍼부었다. 하지만 돈은 이미 보낸 뒤였고 전화는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블로그로 애드포스트를 하던지, 쿠팡파트너스 같은 제휴수수료를 할 수도 있었을텐데. 나는 그 일이 있은 후 무엇을 시도해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드라마 보고 그림 그리고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를 키우면서 겪는 모든 일이 낯설었다.


  나에게 제일 힘들었던 점은 두 시간마다 수유를 하는 일이었다. 아이는 위가 작으니 조금 먹고 금방 소화를 시킨다. 문제는 밤이었다. 나는 잠을 자야 하는데, 2시간마다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했다. 남편은 다음날 회사를 가야하니 자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아이의 울음소리가 나면 바로 눈을 떠서 수유를 했다. 젖을 물고 잠이 들면 트름을 시키고 자리에 눕히고 다시 눕는데, 1시간 반 있다가 또 일어나서 그 일을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생기는 돈 문제도 당황스러웠다. 우리의 수입원은 남편 월급 하나인데 입이 하나 더 늘었다. 아이는 모유수유를 해서 분유를 살 필요는 없었지만, 내가 아이에게 주는 만큼 더 먹어야 했다. 밥을 먹고 뒤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기저귀도 그렇게 자주 쓰는 지 몰랐다. 아이용품을 사야하는 등 돈이 들어갈 일이 생겼다. 남편은 돈을 더 많이 받는 일을 찾아 이직을 해야 했다. 이직을 한 후에도 고정 지출이 나가고 나면 생활비가 마이너스였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는 것이 눈치가 보였다. 남편은 아이가 어리니 집에서 돌보는 것이 맞고 아이를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매달 줄지 않는 카드 값을 볼 때마다 내 스스로 부담을 느꼈다. 들어오는 돈이 뻔하니 지출을 줄여야 했다. ‘밥을 먹지 말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사람이 밥을 안 먹고 살 수는 없다. ‘다시 일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이 어린 것을 두고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이제 겨우 앉고 기어다니는 애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것에 걱정이 앞섰다. 선생님과 잘 지낼수 있을까? 그나마 맞벌이 점수로 대기가 없이 어린이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분유와 젖병, 기저귀와 물티슈를 챙겨서 어린이집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어린이집 가방 챙기는 9개월



  9개월이 된 딸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을 하게 되었다. 7시 50분에 어린이집 앞에서 출근하는 선생님을 기다렸다가 아이를 맡기고 10시간을 근무했다. 퇴근 후, 40-50분정도 버스를 타고 부랴부랴 어린이집으로 가면 7시 30분이 넘어간다. 어린이집에는 원장 선생님과 아이 밖에 없었고, 아이는 매일 작은 유모차에 앉아서 잠이 들어 있었다. 어린이집 원장선생님이 나를 붙잡고 이야기한다.


  "아이가 아침에 제일 먼저 와서 제일 늦게 가니까 많이 힘들어 해요."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아이를 안고 참 많이 울었다.


  나는 회사에서는 10시간 근무를 하지만 출퇴근 시간때문에 아이는 12시간을 어린이집에서 생활해야 했다. 태어나서 엄마 아빠와 함께하지 못하고 낯선 사람들과 12시간을 지낸다는 것은 많은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주말에 어린이집 근처로 향하면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갈 정도로 그곳을 싫어했으니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 없이 아이를 만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 알고 있었지만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고 이런 상황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회사에 가지 않으면 그마저 유지되는 생활조차 되지 않기에 일을 그만 둘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눈물만 나오고 답답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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