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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Aug 05. 2021

'바람구두'를 신고 글을 쓸 수 있을까?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 이야기를 읽으며

나 혼자 하는 부, 화요일의 인문학 시간표는 아침-<돈키호테1>과 저녁-<프랑스 상징주의> 책이다.

방학을 맞은 세 아이들이 방해하지 못하는 아침 1시간, 2시간을 내는 정도다

돈키호테는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인데 지금은 거의 끝나가고 있다.  <열하일기 1,2,3>권은 거의 6개월이 걸렸는데 한번 완독해본 경험이 생겨선지 <돈키호테>는 3개월만에 끝이 보인다. '꾸준함'의 힘이다. 돈키호테에 관한 글도 8월안에 기록해볼 작정이다.


<프랑스 상징주의>란 책은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책으로 강의교재처럼 생겼다. 샤를 보들레르나 T.S앨리엇, 랭보시집을 사니까 책방에서 이 책을 함께 읽어보라고 추천해줬다. 그 쯤 19세기 문학에 눈을 뜨면서 사실주의, 자연주의, 모더니즘같은 문학사조를 아는것이 당시 시대배경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단 걸 알았던 차였다. 욕심내지 말고 한주에 한 꼭지씩 천천히 필기하면서 읽어보려고 화요일 시간표에 넣었다. 어젯밤이 세번째 시간이었다.


상징주의가 무엇인지 꼼꼼하게 정리해준 김경란 저자 덕분에 5장 시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즐거웠다.

19세기 문학을 읽으려면 당연히 그 시대 배경이 가장 중요하다. 고전이 지루한 까닭은 시대가 다르다는 것. 글이 쓰였을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에 작품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아서 이제야 고전읽는 즐거움에 빠져있다.

영화 <토탈이클립스> 스틸 컷, 왼쪽이 랭보역을 맡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문학이 쓰인 그 시대로 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화다.

시인 랭보와 베를렌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은 <토탈 이클립스>는 그 당시 프랑스와 유럽을 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덤으로 열일곱 랭보역을 맡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풋풋한 시절을 감상하며 눈이 즐겁기도 하고 말이다. 그 영화를 보고 상징주의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니 그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착각이 일어난다. 랭보가 보낸 여덟편의 시에 반해서 그를 파리로 초대해 사랑에 빠진 스물일곱의 시인 베를렌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랭보처럼 풍경을 이끌거나, 보들레르처럼 풍경속을 드나듦이 아니라, 풍경을 아파하는 것이다"

베를렌은 그 당시 새롭게 몰아치는 형식을 파괴하는 실험적인 시를 쓰는 당대 상징주의 시인들에 비해 다소 소극적인 편이었다고 말한다. 비유와 상징이 적고 난해하지 않았다는 것. 상징주의를 연 보들레르나 천재시인 랭보에 끼어 베를렌도 많이 괴로웠겠구나 싶다. 저자가 옮겨 놓은 베를렌의 시를 읽다가 랭보 시를 읽으니 그 차이를 알겠다. 모든 풍경과 사물이 베를렌 감정의 옷을 입고 너울거린다. 랭보의 시는 비유와 상징으로 시야의 보폭이 단번에 넓어진다. 인용된 랭보 시 한구절에 마음을 뺏길 정도다. (특히 오 마녀들이여-부터는 요즘 말로 심장이 마구 아플 정도다.으악~~)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옛날, 나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포도주들이 흘러내렸던 축제였다.
어느 저녁 나는 무릎 위에 '아름다움'을 앉혔다. - 그리고 그것은 쓰디쓰다는 것을 알았다. - 그래서 그것을 모욕해주었다,
나는 정의에 대항했다.
나는 도망쳤다. 오 마녀들이여, 오 비참이여, 오 증오여 내 보물은 바로 너희들에게 맡겨졌다.
랭보의 <서시> 중에서


폴 베를렌과 아르튀르 랭보

랭보가 외친 '나는 타자다'-시의 공간도 글의 공간도 자신과의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p.110) '나는 타자다'라는 말은 주관과 객관적 진실이 서로 모순되지 않을 수 있도록 통일된 경지이며, 인식의 장애물들이 정신의 힘으로 극복된 상태를 말한다. 나와 타자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다.(중략) 타자인 나는 나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고 그 전개를 성찰한다. 이 몰아적 정신과 감각의 상태에서, 시는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아가게 하라는 것이다.


글쓰기 선생님이 말했던 부분과 정확히 일치한다. 랭보는 자신을 멀리서 바라보는 견자의 태도를 역설한다. 나에 대한 에세이를 쓰더라도 나를 '타자'처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건데... 그러러면 나 스스로를 완전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모르는 대상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으로 쓰려면 최대한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하듯이 내 얘기를 쓸때도 나를 완전히 알아야 하고 그게 '나는 타자다'라는 태도이다. 그래야 독자에게 가 닿을 수 있을 테니까. 내 글쓰기가 막히는 까닭도 거기에 있겠다.


그렇게 저자가 옮겨놓은 랭보시들을 짧게 짧게 감상하다 집에 있는 <지옥에서 보낸 한철>(민음사, 1974) 시집을 읽어보았다. 김현이 옮겼는데 보니까 40여년전에 옮긴 것이다. 어쩐지  어렵더라. 뭘 말하는지 알긴 알겠는데 왜 와닿지 않지? 했는데 번역문제였다. <나의 방랑>(나의 보헤미안)이라는 시도 번역투(?)가 아주 다르다.  한사람의 번역만 보면 안되겠단 생각을 했다. 더욱이 시는...

 

이렇게 영화와 더불어 문학의 기본 개념들부터 시인을 짚고 넘어가며 랭보의 시를 읽으니 가슴이 마구 뛴다. 어쩌면 이렇게 시를 잘쓸까, 베를렌이 부러워한 까닭을 알 것 같다. 어젯밤 일기에 쓰인 감상평을 옮겨본다.


- 나는 랭보의 시를 부러워하는 베를렌같다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연 그 자체, 그 규칙안에서 안주하며 소심한 실험을 하는...랭보를 짝사랑하는. 나 스스로에게 타자가 되지 못하므로 나는 시인도 작가도 될 수 없다.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라니... 그의 손에 잡히지 않는 랭보를 베들렌은 그림으로 시로 풍경으로 가두려 하다 결국 그 천재의 손목에 총알을 박는다. 이 시인들의 삶과 사랑이 격렬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  좀처럼 들뜨지 못하는 내가 오늘밤은 잠을 못 이룰것 같다.


베를렌이 그를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라고 하였듯이
거침없이 그의 행보와 꿈의 뒤를,
시는 자연스레 뒤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같은책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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