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자전거 탄 아이가 뒤에서 받아 날 쓰러뜨린 이야기를 일기에 쓰면서, 내 다친 것에 정신이 팔려 정작 그애에겐 괜찮냐고 묻지 못하고 보낸 나를 뒤늦게 부끄러워했다. 어릴 때는 다치면서 사는게 보통의 일과였는데 어른이 되면, 부모가 되면 아프고 겁나고 우울해지는데 내 잘못인 것 같으면 창피하기까지 하다. 한 달전 사고가 그랬다. 그렇게 다치고 어제 또 이런 사고가 나니까 아니, 왜 멀쩡하게 서있는 사람을 보지도 못하고 박는지 화가 먼저 치밀었던 것이다.
쟤한테는 너무 큰 자전거네, 너무 빠르게 지나가나 싶더니 왜 돌아오면서 사람을 못보는 건가, 내가 안다쳤으면 내 옆에 막내가 얼마나 심하게 다쳤을까...그러면서도 왜 자꾸 자질구레한 사고들이 내 일상을 망치려 드냐고. 불편함을, 갑작스러움을 참지 못한 것이다. 그런 반성 중에 현장을 지켜본 둘째가 마무리 펀치. "내가 걔 얼굴 봤는데 울컥해보이더라."
이번 상처는 내가 잘못한게 아니라 창피한 건 면했구나 했는데, 내 울컥이 몸둘바를 모르고 숨을 곳을 찾는다.
# 2
지난 일요일에는 나주책 멤버들을 두 달만에 보았는데 들고 나는 과정을 거치며 여섯명이 된 뒤로 모두 나온건 오랜만이다. 올해가 벌써 4년째. 직장인 세 분, 전업주부 세 분(나포함) 그 가운데 학교 선생님도 계시고, 아픈 아이를 돌보는 엄마도 있고 나처럼 셋을 키우는 엄마도 있다. '엄마'라는 정체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공동체인 셈이다. 작년에 글쓰기 강좌를 함께 하다가 한 분 들어오시고 올해 이사로 두 분 나가면서 한 두분 만 더 모시고 싶어 방법을 고민중이다. (김포에서 대면 독서모임을 할 수 있으신 분들 있으시면 댓글로 문의주세요)
일요일도 사용가능한 한살림 모임방에서 모임을 하고 있는데 작년에는 꿈틀책방과 연계해서 글쓰기 강좌를 들었고 올해는 짙은 책방에서 운영중인 글방에 참여중인 멤버도 있다. 한살림에 소속되어 있지만 김포에 책방이 많아서 여러 정보와 활동을 교류하며 '나를 찾는 주말 책나들이'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 3
어제는 꿈틀책방에서 진행하는 <강창래의 인문학 강독회>에 다녀왔다. 언어와 문학을 끝내고 미술사 들어가는 3년차때 내가 불쑥 들어간것인데 처음엔 여긴 어느 별이고 나는 누구지? 하며 내가 옅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는 그 어두운 터널끝에 다다른 느낌이다.
들른 도서관에서 나가기 전 책점을 보았다. (어떤 코너에서 눈에 들어오는 책을 골라 아무 페이지를 펼쳐 그 글월을 옮겨 적는 것이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쇼펜하우어 잠언집>(뜻이 있는 사람들, 2019)이었다.
(p.64)자신의 장점에 민감해져라. 세상 사람들의 절반은 뻔뻔하고 무모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남보다 뛰어난 장점이 있고, 그것을 잃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그 장점을 똑똑히 직시해야 한다
나는 점점 내 장점을 의심하고 내 모든 것들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나를 찾겠다고 시작한 인문학이 나를 잡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책점으로 찾아온 이 메세지는 없는 것을 애써 얻으려는 것도 중요하지만 갖고 있는 것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가르침이었다. 어제 강독회가 끝난 뒤 차한잔 하면서 강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도 하셨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여러사람의 조언과 해석을 듣는 것은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선택은 독자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기 스타일이 된다.
내게는 그 말이, 내가 너무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고 따라가려 애쓰지만 그런 것들은 하나의 해석으로 받아들이라는 조언같았다. 내 선택에 자신감을 갖으라는 것. 나의 장점을 잃어버리지 말고 내 판단을 나 스스로 존중하자고 마음이 먹어졌다.
# 4
지난달에 소크라테스를 플라톤의 텍스트와 크세노폰의 텍스트로도 읽었는데 조금은 비판적으로 읽으려고 애썼다. 배경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질문도 비판적 사고도 하기 어려운 처지이다. 하지만 고전은 당대의 시점으로 한번, 현대의 시점으로도 그 텍스트가 쓸모가 있는지 읽는 것이기 때문에 당대의 시점은 힘들더라도 현대의 시점으론 나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 회상록>(천병희옮김,숲)을 읽으면서는 의아한 부분이 많았다. 민중에 대한 정의도 그렇고, 통치자는 명령하고 피치자는 복종해야 하는 게 마땅한 이유는 통치자는 통치하는데 전문가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의아했다. 엘리트의식과 선민의식이 보이는 그의 발언들은 좀 아닌 것 같다고 고백독서클럽에 (고백독서클럽은 고전과 책을 읽고 날마다 독서인증하는 밴드) 남겨놓고 멤버들이 그 글을 읽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나를 발견했다.
충분히 알아본 것이 맞는가?
내 식견은 믿을 만 한가?
그렇게 유명하고 당대까지 회자되고 있는 소크라테스를 까도 될까?
결국 이런 검열들은 내 의견에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를 감추고 입닫고 조용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니까
자위하며 목소리 내기를 어렵게 만드는 것 아닐까?
스스로의 이성도 못믿게 하면서 자신감을 떨어뜨렸다. 이런 자기검열은 사회가 내게 심어놓은 장치가 아닐까?
# 5
수요일에 한살림 김포지구 운영위원회 회의가 있었다. 새내기 조합원들의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기존 조합원의 재능기부 강의를 기획하는 회의가 길어지고 있었다.
"민희 님 혹시 할 수 있는 강의 있지 않을까요? 책 많이 읽으시니까 그쪽 관련해서요"
이 질문에 내 답은 아득해졌다. 내 인문학공부나 독서는 나눠줄수 있는게 없었다. 요즘같이 유능한 유튜브와 각종 자기계발서, 에세이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내가 무엇을 그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 것이며 누가 내 이야기를 들으러 와주겠는가. 지금의 내 관심사는 실질적으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구나, 무력감이 몰려온채로 회의는 끝났다.
1년째 없어지지 않고 화초와 함께 살아가는 깍지벌레들은 오늘 아침에도 나를 그들 앞에 세워놓았다. 계피를 섞은 물도 뿌려보고 친환경 약제를 주기적으로 쓰는데도 이 깍지들은 어쩌면 이렇게도 새롭게 태어나고 더 강하게 진화해서 화초와 한몸처럼 공생하고 있는가?
인간보다도 더 뛰어난 적응력과 빠른 진화력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혹시 작아서 그런걸까? 그렇다면 내가 작게 태어난 것도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한반도 남쪽 끝 1만 인구도 안되는 섬에서 자라 인구1천만의 수도권에서 이렇게 잘 적응한것은 어떤 장점덕분이었을까? 이른 아침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독서를 시작할 타이밍이었다.
<나주책>으로 시작한 '나를 찾는 책읽기'는 <인문학 강독회>로 나아가고 <고백독서클럽>에 날마다 책후기를 남기면서부터 어떤 패턴이 생겼다. 내가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취학과 동시에 잘려버린 싹들이 얼굴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인문학은 내게 질문하는 능력이 있음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방법 또한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얻지 못할 답은 없었다. 내 존재에 대해서도 말이다. 내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해결하는 힘과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언젠가는 내 존재로 인해 다른 존재들이 힘을 낼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실용적인 뭔가는 되지 않을지 몰라도 인문학은 내 진화를 돕는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이 났다.
일요일, 한주의 시작이 다가오고 있다. 달력에 한 주의 시작이 일요일인것이 시각적으로라도 퍽 마음이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