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최종 인쇄 파일을 넘긴 날

텍스트 안에 머문 저자의 마음 읽기, 마지막 교정지를 받고

by 땅콩

출판사를 차린 것도 출판사에 책을 낸 것도 아닌 좀 오묘한 케이스인 나는 어찌 됐든 3개월의 제작 준비과정을 마치고 어제 최종 인쇄파일을 넘겼다. 편집자를 구해야 했을까? 출판사를 찾아가야 했을까? 표지디자인을 맡겨야 했을까? 이런 회고를 해보지만 이건 4개월 안에 나와야 하는 책이었고 예산이 정해져 있었고 내 원고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퇴고도 계속 해서 맥락을 잡아야 했다. 편집자(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 편집자가 작가의 원고를 보고 제안하는 것도 아닌 내 책 좀 편집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입장인데 그게 4개월 안에 찾아질 리 있나. 직접 출판하는 과정을 통해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고 완벽하려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았다.

그래도 교정이나 제작사양에 대해 도움을 받아야 하고 ISBN도 등록하면 나의 이력에도 작은 이력이 될 것 같아 평소 친분이 있던 책방운영 출판사에게 ISBN과 제작에 관한 제안을 드렸다. 주체는 '나'지만 시스템의 도움은 받으면 아무래도 안심이 된다.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할 수는 없고 결정적으로 심리적인 불안함을 이기게 해주는 건 같이 제대로 고민해 줄 상대가 있다는 안정감이다.


'동료의식'


마감 닷새 전, 최종 PDF파일에 대한 교정을 넘겼다. 내 원고는 총 세 사람의 교정, 교열의견을 받았다. 그중 마지막에 PDF파일 교정을 봐주신 분이 내게 남겨준 경험이 매우 뜻깊었다. 저자는 마지막까지 원고를 고치게 되는 경우가 많은 데 한국어는 ‘띄어쓰기’ 규정이 매우 복잡하다. 이미 두 번을 거쳤음에도 수두룩한 플래그가 붙여진 원고가 도착했고 기본적인 교정지식을 쌓을 필요를 절실히 느낄 정도로 꼼꼼한 교정지를 마주했다.


“한 장 한 장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운 책이었어요. 집 이야기가 특히 좋았어요. - 250531 교정을 끝내고

마지막 페이지에 쓰여 있는 메모를 읽고 울컥했다. 내게 편집자가 있다면 이런 말을 듣고 싶었으리라. ‘집 이야기’는 ‘개인의 일기 같아서 안 궁금하다’, '첫 파트부터 ‘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도입이 힘이 약하다.'라는 편집의견을 들었던 터라 일부러 ‘집’에 대한 글들을 많이 덜어내었는데 너무 많이 덜어내버린 건 아닐까 후회가 되었다. 무엇보다 교정을 보시면서 내 원고를 깊이 읽으려고 애쓰신 것 같은 코멘트가 많았다. 물론 ‘주술호응이 안된다’, ‘비문이다’ 같은 날카로운 지적도 도움이 되지만 어떤 식으로 그것을 전달시키는가 ‘다정함’의 문제는 오로지 개인의 역량이라는 걸 이 분 보면서 배웠다.

내가 가진 ‘장점’이 곧 ‘단점’이 되기도 한다. 단점 안에 ‘장점’이 내재되어 있기에 단점을 배척하고 없애려고 하면 ‘장점’도 확신을 잃고 거기에 휩쓸리기 쉽다. 둘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려면 충분히 장점을 어필하는 것이 필요하다. ‘글’을 오류를 찾아내고 정확하게 고치는 대상으로만 생각하면 미래엔 AI가 그 일을 더 잘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정을 보는 사람도 하나의 독자이고 교정지를 받아본 저자도 교정의견을 마주하는 인간이다. ‘글(언어)’은 한 개인과 쌍둥이 같은 존재다. 어떤 마음을 시각적으로 언어화하는 작업이 저자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이다. 교정 테크닉이 좋은 사람은 ‘제작’에는 유리할지 모르지만 글쓴이가 가진 최대치를 끌어내는 데는 다정한 테크닉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걸 이 분의 교정지를 받고 느꼈다.


물론 이것은 교정지를 받은 저자의 입장이고 도무지 대책이 안 서는 글을 글이랍시고 교정을 봐야 하는 교열인에게는 또 다른 입장이 있을 것이다.(내 글이 형편없는 글이었을 수도 있고ㅠ) 이번에 편집자 없이 세 사람에게 교정을 맡기면서 내가 만약 편집자라는 역할을 우연히라도 맡게 된다면(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이번 경험을 양분 삼아 테크닉+다정함을 탑재해 보자고 다짐했다.


우리가 문학을, 책을 읽는 이유는 잘 만들어진 사물, 제품, 상품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그 안에 들은 마음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 주술호응이 안 되는 문장이나 비문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거기에 표현하고 싶어했던 진심까지 지워버리지 않도록 교정하는 과정에 섬세한 테크닉을 기하자.

그렇다면 상대에게 조언을 할 수 있는 기준이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서'라고 간단하게 답하기 어려워진다. 나에게 상대방에 대해 알려고 애쓰는 마음이 충분했는가? 즉, 텍스트를 통해 저자가 하려는 말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는가 스스로 물어야 하겠다. 책에 대해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고 싶진 않지만 출판을 겪다 보니 반성이 된다. 내 책이라고 너무 나만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지 않았나,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충분히 애쓰긴 했을까?



+ 다음에는 인쇄소 감리 다녀온 이야기를 써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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