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피검사 날이다. 시험관의 꽃. 임신인지 비임신인지가 확실히 정해지는 날이라 희비가 교차하는 날이다. 이번에는 어린이날이 껴 있어서 2주라는 긴 시간 동안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예전에 시험관 카페에서 많이 봤던 것 중 하나가 "기다리는데 피 말린다."라는 거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잔뜩 어떤 영화를 볼지 계획을 해 두었다.
잔인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 이렇게 잔인하지 않은 영화와 그 영화를 어느 ott에서 볼지도 리스트 해서 정해놨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한 셈.
준비한 영화들도 보고, 드라마도 보게 됐다. 예전에 브런치에도 한 번 리뷰를 올렸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번아웃이 왔을 때 보기 좋은 드라마였다.
책도 빌려뒀다. 전부터 읽고 싶었던 <키르케>가 도서관에서 대출가능이라 빌려왔다.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정신없이 읽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도 임신에 도움 되지 않을 만한 일은 안 했다. 행여나 동네를 벗어나면 안 좋을까 싶어 돌아다녀도 집 근처를 벗어나지 않았다. 밀가루가 몸에 안 좋다고 해서 먹지도 않았다.
양가부모님도 물심양면 신경 써주셨다. 착상에 좋다는 부추며, 오리고기 등 반찬을 가져다주시고 비싼 소고기도 사 주셨다.
피검사를 하기 전 테스트기를 하고 실망할까 봐 테스트기도 안 했다.
그리고 오늘. 결과가 나왔다. 수치 0.1로 비임신. 너무나 확연한 비임신이라 할 말이 없다.
모두의 실망과 속상함이 느껴지고 나 역시 그렇다.전원도 했고 배아상태도 좋았고 이번에는 다 좋았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기대도 했다. 자궁경으로 폴립도 제거하고, 유전자 검사 pgs도 하고 그랬기에 착상 실패의 원인조차 모르겠다.
이것 때문에 회사를 관두고 정말 열심히 마음 편하게 있으려고 했던 건데. 아니, 정말 하고 싶은 거 실컷 하면서 마음은 레알 편했는데. 너무 편했나?
속상하고 속상하고 속상하다. 비임신이 되었으니 그간 보고 싶었던 가오갤 3 보러 가고 마음 편히 친구들 만나고 커피도 마시고 해야지.
아직 내게는 남은 배아가 많이 남아있으니,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실망하고 좌절하지 말기.
내가 커뮤니티에서 우연히 보고 정말인상 깊었던 영상이 있다. 한 여자가 컵에 물을 담고 인생이라고 말하며 거기에 흙을 넣는다. 이 흙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개똥 같은 일이라고. 당연히 깨끗했던 물은 흙탕물이 된다. 이때 이 흙을 다 건져내려고 해도 절대 다시 맑은 물이 될 수 없다. 그럴 땐 깨끗한 물을 퍼부으면 물은 다시 맑아질 수 있다. 여자는 이때 깨끗한 물이 좋은 것들이라 말한다. 결국 좋은 것들을 퍼부으면 인생의 개똥 같은 일들은 잊히며 내 인생은 다시 깨끗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