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 - 거절법
작년에 내가 받은 이메일 한 통을 소개합니다.
"안타깝지만 F2F 인터뷰를 진행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서류 Screening 결과..."
당혹스러웠습니다.
이 포지션은 제가 원해서가 아니라,
상사의
상관의
상관이 직접 제안했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연봉과 근무 조건이 내키지 않았음에도
'리더십 경험'과 '가족과의 근거리 거주'라는
명분을 억지로 만들어
스스로를 설득하며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서류 탈락’이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자산과 신분을 정리할 고민까지 했던
내 시간과 노력이 한순간에
수치심으로 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문득 대리 초년생 시절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의 저는 '거절의 짜릿함'을 아는
못된 갑이었습니다.
협력사에게 "이렇게 하시면 제가 승인해 드리기 어렵습니다"라며
공손한 척 권위를 휘둘렀습니다.
거절을 통해 나의 우위를 확인하는 행위는
일종의 도파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깨달았습니다.
상대를 누르는 거절은 '하수'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관계를 파괴하고 잠재적인 적을 만들 뿐입니다.
진짜 고수는 거절하면서도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고,
오히려 나를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파트너'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비결은 '나 vs 너'의 대결 구도를
'우리 vs 문제'의 구도로 바꾸는 것입니다.
비난의 화살을 사람(You)이 아닌 대상(It)에게 돌리는 기술입니다.
하수: "김 대리, 이 보고서는 논리가 부족해. 다시 써와야겠는데." (공격 대상: 김 대리의 능력)
고수: "김 대리, 우리 이 데이터를 같이 볼래? 이 그래프가 경영진을 설득하기엔 아직 날카롭지 못한 것 같아. 어떻게 보강하면 좋을까?" (공격 대상: 데이터와 그래프)
나는 너를 평가하는 적이 아니라,
함께 '문제'라는 적을 물리치는 코치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 협력사와 단가 협상을 진행할 때의 일입니다.
업체가 가져온 견적서 중 유독 'D 항목'이
거대한 금액으로 잡혀 있었습니다.
산출 근거를 물었으나,
담당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습니다.
"저희 제조(ME) 팀에서 넘어온 숫자라
정확한 세부 내역은 저도 모릅니다.
이번 달 말 양사 기술팀 미팅 때 직접 물어보시는게 어떠실까요."
보통 여기서 하수들은 화를 내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합니다.
이렇게 되면 업체는 방어 태세로 전환하고,
우리의 의도가 가격을 낮추기 위함을 상기하며
정보를 더 꽁꽁 숨깁니다.
저는 여기서 '제3자 화법'을 꺼냈습니다.
비난의 화살을 담당자가 아닌,
제 노트북 화면 속 '원가 모델'로 돌린 겁니다.
"담당자님, 제가 이 프로젝트를 얼마나 밀고 싶어 하는지 아시죠?
그런데 문제는 제 화면에 띄워진 이 '원가 분석 모델'입니다.
보시다 싶히 말씀하신 D 항목에 대한건
저희쪽 원가 카테고리에는 없는 항목이에요.
이 비용이 필요없다고 말씀드리는건 당연히 아니구요.
저희는 A,B,C항목만 있으니,
D항목을 세부로보면 아마,
A,B,C에 각각 맞는 sub 항목으로 배정할수있을거에요.
그런데 지금은
아무 백데이터도 없는 '블랙박스'같은 상태니까요.
우리 시스템은 이 항목을
'리스크(Risk)'로 인식해서
빨간불을 띄웁니다.
이대로 보고하면
제 리더십은 무조건 드롭(Drop) 시킬 겁니다."
상대의 눈빛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싸우는 적이 아니라,
'빨간불이 뜬 모델을 그린라이트로
바꾸기 위해 공모하는 팀'이 된 겁니다.
상대쪽 담당자는 제조팀을 들볶아 세부항목을 주었고,
그중에서 뺄건빼고,
A,B,C에 넣을 수 있는건 넣었습니다.
억지로 깎으려 할 땐 나오지 않던 정보가,
'함께 통과해야 할 관문'을 설정하자마자 쏟아져 나온 겁니다.
지난주, 지하실에 폭우가 들이쳤습니다.
벽 틈(사진의 파란 화살표)으로
물이 새어 나와 바닥에 고였습니다.
급히 부른 방수 업체 직원은 베테랑 영업맨이었습니다.
그는 빨간표시된 바닥을 뜯고 구멍 뚫린 파이프를 심는
수백만 원짜리 공사를 제안하며 몰아붙였습니다.
"이 파이프는 특허받은 제품입니다.
평생 보증해 드리고요, 오늘 결정하시면 5% 할인에
2년 무이자 할부까지 해드립니다.
집 망가지기 전에 지금 하시겠습니까?"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저는 찬찬히 말을 이어갔습니다.
이번에 제가 활용한 '제3자'는 바로
'내 의사결정의 우선순위 리스트'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지금 제 머릿속에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한 3가지 옵션이 싸우고 있습니다.
옵션 1은 물이 아예 안 들어오게 밖에서 막는 것(원천 차단),
옵션 2는 저 틈새를 직접 메꾸는 것(지점 보강),
옵션 3은 당신이 말한 '물이 들어오면 빼내는 배수 시스템'입니다.
전문가 입장에서 볼 때,
옵션 3은 방수가 뚫렸을 때를 대비한
'백업'이지 '해결책'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옵션1과 옵션2처럼 물이 안들어오게
원천차단이나 지점보강이 우선일지 아니면,
백업의 배수 시스템이 먼저일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솔루션이 나빠서가 전혀 아니라,
한정된 자원 내에서,
일단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솔루션을 먼저 해야할거 같아서요.
전형적인 영업 멘트를 준비했던 직원은
당황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음... 듣고 보니 고객님 말씀이 논리적으로 맞네요."
상대의 제안을 '거부'한 게 아니라,
내 '결정 프로세스'에 대입했을 때
아직 순서가 아님을 인지시킨 겁니다.
그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오히려 본인이 아는 외부 방수 전문가를 소개해 주고 떠났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거절하는 입장이었지만,
반대로 상대가 내 제안을 거절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이퍼포머는 거절을 '판결'이 아니라 '추가 정보'로 활용합니다.
앞서 언급한 서류 탈락처럼
결과가 확정된 경우에는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냥 물러나는 것은 하수입니다.
결과에 대한 '데이터'를 요청하십시오.
"결과를 겸허히 수용합니다.
다만, 향후 제가 더 보강해야 할
역량이 무엇인지 피드백을 주신다면
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 한 문장이 당신을 '탈락자'에서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인재'로 격상시키고,
다음 기회의 문을 열어둡니다.
대부분의 거절은 "절대 안 돼"가 아니라
"(지금 이 조건으로는) 안 돼"입니다.
이때 필요한 기술이 바로 'Enabler 찾기'입니다.
섣불리 상대를 설득하려 들지 말고,
거절의 벽 뒤에 숨은 조건을 파헤쳐야 합니다.
만약 제가 앞서 말한
지하실 방수 업체 직원이라면,
제 거절에 이렇게 응수했을 겁니다.
"우선순위에 대한
고객님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저도 팀에 돌아가서
옵션 1, 2를 저희가 지원할 방법이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여쭤보죠.
만약 저희가 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게 된다면,
고객님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시는
'결정적 요인(Enabler)'은 무엇인가요?
예산인가요, 공사 시일인가요,
아니면 제가 옵션 1, 2에 대한 대안까지
가져오는 것인가요?"
이 질문은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Yes라고 말하기 위해 필요한 퍼즐 조각'
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행위입니다.
상대의 결론을 '판결'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되게 하는 조건'을 파악해 내가 맞출 수 있는 카드인지 확인하십시오.
거절하는 상대는 이미
심리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솔직한 정보를 내놓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상대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면,
설사 이번 딜(Deal)은 실패하더라도
다음 협상에서는 당신이 필승의 카드를 쥐게 될 것입니다.
거절이 나의 주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객관적인 기준과의 불일치'임을 설명하십시오.
상대를 내 벙커 안으로 초대해
함께 문제를 바라보게 하십시오.
마찰은 절반으로 줄고,
당신의 주도권은 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