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현적 나르시시즘의 종말

by 매너티연




외현적 나르시시스트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 중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를 많이 다루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째, 외현적 나르시시스트들은 일반적으로 비호감 짓이 눈에 띈다. 이들은 결국 어느 시점에서 도미노처럼 하나를 건드리면 무너지게 되어있다. 이들 주변에는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정도 있기 때문에 한 명이 나서 주기만 해도 벌 떼처럼 몰려올 적들을 은근하게 많이 만들어 놓는 타입들이다. 만약 당신이 그들의 시체가 떠내려가기를 기다린다면 오랜 시간 기다릴 필요 없다. 이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산사태 유형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플라잉몽키가 아니었다면 피해 입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괜히 힘 뺄 필요 없다. 분석할 필요도 없고, 그저 피하면 되는 족속이다.(물론 이들이 다루기 쉽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최근에 나르시시즘에 대한 많은 정보를 통해 한눈에 찾을 수 있으니, 이 점이 유리하다.)


둘째, 반면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현미경 없이는 알아챌 수 없는 족속이다. 이들의 행동은 표면적으로 문제가 없다. 의심할 수 없는 엄청난 배려심과 친절이 '?' 의문을 갖는 사람은 있어도 이내 '내가 예민한가? / 뭐.. 착하니까'로 넘어가기 일쑤다. 반면, 그들의 인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을 괴롭히는 예민한 사람이 되어있다. 외현적 나르시시스트들과 달리 이들은 자기 자신도 속이기 때문에 괜찮은 사람인 척 연기를 정말 잘한다. 자신이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어야만 자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기가 죽을 맛이더라도 속으로는 ‘나는 착하며 성실하게 잘 살고 있어요.’라는 믿음과 함께 사람들에게도 그런 사람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러나 자신이 마음에 안 들거나 화가 나면 대놓고 험담을 하거나 직접적으로 필요를 구하진 않는다. 은근하게 요구하고 험담을 상대로부터 유도한다. 그러니 이들을 의심하는 사람은 예민한 인간이 된 셈이다.




나르시시즘이 마지막으로 허용되는 시간은 25~35세이다.


30대 이후 나르시시즘은 사회악이다. 떠오르는 젊은 후배들의 성과를 갈취하고, 시기하고 질투한다. 선배와 직장상사는 모두 자신의 적이다. 만약 일이 안 풀리면, 자신의 고결함을 내세우며 '사회가 너무 세속적이다'거나 '다들 나를 못 깎아 내려서 안달'이라며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족함은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이가 차면 점점 자존심과 권위만 세우는 어른이 된다. 새로운 지식을 배울 마음도 없고, 타인의 말을 경청할 생각이 없다. 이미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30대

20~30대 초반은 사회 경험과 실패경험이 적으니 객기 어린 모습과 무모한 행동력, 자신만만한 태도가 암묵적으로 허용된다. 이를 사회가 도전 정신이라며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처럼 관대하진 않다. 실수와 어리석음엔 엄격하다. 사회는 그들에게 객기와 자신감을 결과로 입증하도록 등 떠민다.


만약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땐, 그들은 열과 압력을 견뎌낸 제련된 칼처럼 성장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는 사회생활을 잘하냐 못하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사회든, 가정이든 어떤 환경에서도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묵묵히 살아갈 수 있냐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없이 객관화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그저 무능한데 자존심만 센 인간으로 방치하는 것과 같다.


30대 이후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한 30대는 자신의 무능함을 직면해 본 적 없거나 무능함을 들키기도 전에 퇴사를 해버리거나 남들에게 멋져 보일 허황된 꿈에 시간을 낭비한다. 무능하고 취약한 내면을 바라본 적도 없으며, 발전하는 방향으로 가기보단 본인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이상화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30대가 되면 세상이 쉽지 않다. 자신보다 유능하고 성숙한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고 자신은 도태되어 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을 마주하지 않으려 마땅한 계획도 없이 혼자 뭔가를 계속 시도한다. 진짜 문제점은 자신이 여전히 대단하고 뭐든 하면 성공할 거라는 나르시시즘 때문에 구체적인 계획은 피하고 막연하게 시작만 한다. 잘하고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재능이 무엇이고 꿈은 무엇인지 그리고 10년 이후의 삶과 자산은 어떻게 계획할 것인지, 노년에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다. 그런 세밀한 계획은 자신의 무능함을 직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그저 막연하게 재능 있는 인간으로 판단하며 언젠가 인정받고 성공할 거라 굳게 믿는다. 이는 과거의 성공경험 즉, 지난 영광이 이들을 퇴보하도록 만든 셈이다.


우습게도 이들은 시작조차 어렵다. 비대한 자아가 "그 정도로 되겠어? 더 완벽하고 대단해 보여야 해!"라고 추진력에 물을 끼얹는다. 또한 시작을 하더라도 꾸준함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 그들에게 꾸준함은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들도 무의식 중에 안다. 단번에 성공할 수 없음을 말이다. 성공은 그들에게도 쉽지 않으니 때를 기다려야 하는 과정이 괴롭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과정이 오히려 무능함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적으로 대단한 사람으로 보여야 하니 성공과 성취를 빨리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저 비대한 자아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 허황된 꿈만 가득할 뿐이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많은 위인들은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냈다는 점이다. 심지어 천재였던 모차르트도 죽을 때까지 피아노를 쳤다. 문제의 핵심은 타인의 인정 갈구에 있다.


중년

40대 중/후반부터 깨닫는 것은 너무 늦다. 중년은 노후자금을 준비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날까지 비축에 비축을 더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들은 비축할 에너지가 서서히 고갈된다. 삶 전반을 외부 이미지를 쌓는데 에너지를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쌓아온 재능도 없고, 계획도 없다. 진정한 자아를 외면해 왔으니 무엇을 하며 먹고살아야 할지 알 턱이 없는 것이다.


중년의 나르시시즘이 가장 치명적이다. 그동안 고수해 왔던 자신의 이미지에 균열이 가면서 수 십 년간 외면한 치부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그것을 수습하려 더 과장된 행동을 한다. 이때, 나르시시즘은 극에 치닿는다. 대부분 그 시점에서 고꾸라진다. 분명 ‘내가 꿈꾼 중년의 모습은 이게 아닌데..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내가 제일 피해자야… 내가 제일 불쌍해…’ 주변인들에게 징징댄다. 관대하고 친절한 이미지를 여전히 유지하지만 현실적인 삶은 계속 무너지고 있다. 남 탓(가족, 운명, 돈)을 하며 남은 평생을 힘 없이 중얼거리다가 신세한탄하며 마지막을 맞이한다. 가스라이팅으로 유지해 온 주변인들도 피로감을 느껴 더 이상 가스라이팅이 먹히지 않는다. 그를 지지해 주던 이들은 조용히 사라지고, 늘 계산기 두들겨서 맺어왔던 인연들도 그가 쓸모가 없어지니 연락을 끊는다.



이들은 결국 혼자가 되며 남게 되는 것은 남루한 몸뚱이이다.




사진: Unsplash의 Karl Sol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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