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15장: 귀환
4월 29일.
비행기가 흔들렸다.
정민은 눈을 떴다.
창밖이 밝았다. 구름 위였다.
해가 떠 있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시간을 거슬러 가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을 떠난 지 여덟 시간.
정민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장판 조각이 있었다. 손끝에 닿았다. 꽃무늬의 요철. 닳은 표면.
한 달 반 전에도 이랬다.
마나시를 떠날 때. 구름 위에서. 같은 조각을 만졌다.
그때는 몰랐다. 뭘 찾아야 하는지.
지금은?
메모장 스물여덟 페이지.
노트북 파일 하나. 베타시티 OS v0.1.
충분할까.
모르겠다.
정민은 창밖을 봤다.
구름이 끊겼다. 아래로 땅이 보였다. 바다. 섬들. 한반도.
집으로 가고 있었다.
인천공항.
착륙.
정민은 창밖을 봤다. 활주로. 터미널. 회색 하늘.
마나시의 하늘과 비슷했다.
런던의 흐린 하늘. 암스테르담의 비. 파리의 지붕. 다 스쳐 지나갔다.
안전벨트를 풀었다.
일어났다. 짐을 챙겼다. 백팩. 캐리어는 위탁했다.
통로를 걸었다. 비행기에서 내렸다.
입국장.
긴 복도. 사람들. 안내 표지판. 한글.
한 달 반만의 한글이었다.
입국 심사.
줄을 섰다.
앞에 사람들. 여행객들. 캐리어를 끌고.
정민 차례.
“여권 주세요.”
심사관이 말했다.
정민이 여권을 건넸다.
심사관이 펼쳤다. 도장들을 봤다.
“독일, 영국, 미국, 일본, 대만, 프랑스, 네덜란드. 출장이세요?”
“파견이요.”
“파견?”
“도시 연구요.”
심사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장을 찍었다. 쿵.
“들어가세요.”
정민이 여권을 받았다.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인천공항. 날짜.
귀국.
백팩 앞주머니에서 뭔가가 만져졌다.
파견 통보서. 구겨져 있었다.
한 달 반 동안 접히고 펴지고. 모서리가 해어져 있었다.
꺼내지 않았다. 그냥 만졌다. 손끝으로.
이걸 들고 떠났다. 이걸 들고 돌아왔다.
수하물 수취.
컨베이어 벨트.
정민은 기다렸다.
캐리어가 나왔다. 검은 캐리어.
스티커가 아직 붙어 있었다. 마나시 도시재생본부.
모서리가 까져 있었다.
바퀴에 흙이 묻어 있었다. 클리블랜드 흙인지. 파리 흙인지.
캐리어를 잡았다.
끌고 걸었다.
도착 로비.
로비.
사람들이 있었다. 마중 나온 사람들. 피켓을 든 사람들. 포옹하는 사람들.
정민을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다.
한 달 반전과 같았다.
출구로 걸었다.
자동문이 열렸다.
4월의 공기. 따뜻했다. 습했다. 봄이었다.
런던의 3월과 달랐다. 암스테르담의 비와 달랐다.
마나시의 공기였다.
정민은 숨을 쉬었다.
깊게.
돌아왔다.
버스.
공항에서 마나시로.
창가에 앉았다. 캐리어를 옆에 뒀다.
버스가 출발했다.
창밖을 봤다.
고속도로. 아파트 단지. 상가 건물. 간판들.
한글 간판들.
프랜차이즈. 치킨집. 카페. 편의점.
같은 간판이 반복됐다. 2킬로미터마다. 3킬로미터마다.
연접.
정민은 생각했다.
‘같은 업종이 3개 연속으로 붙으면 위험 신호다.’
여기는 이미 3개가 넘었다. 10개. 20개.
버스가 달렸다. 간판이 스쳐 지나갔다.
정민은 눈을 감았다.
두 시간.
버스가 마나시에 들어섰다.
정민은 눈을 떴다.
창밖.
미래구.
유리 건물들. 고층 오피스. LED 간판.
한 달 전과 같았다.
아니. 뭔가 달랐다.
달라 보였다. 정민이 달라졌으니까.
간판 하나가 보였다.
‘마나시티 - 스마트한 도시, 완벽한 삶’
정민은 그 문구를 봤다.
완벽한 삶.
피식 웃었다.
“완벽한 도시라니.”
혼잣말이었다.
도시는 완벽해지지 않는다. 도시는 영원한 베타버전이다.
암스테르담에서 적은 문장이 떠올랐다.
옆자리 승객이 힐끗 봤다.
정민은 창밖을 다시 봤다.
마나브리지.
버스가 다리 위를 지났다.
창밖으로 강이 보였다. 마나강. 물이 흘렀다. 햇빛에 반짝였다.
왼쪽. 미래구. 유리 건물들.
오른쪽. 하림지구. 낡은 지붕들.
같은 도시. 다리 하나 차이.
한 달 전에도 이 다리를 건넜다.
그때는 떠나는 길이었다. 지금은 돌아오는 길이었다.
정민은 하림지구 쪽을 봤다.
어딘가에 프래그먼트가 있었다. 지금은 문 닫은 카페.
하린이 있었다.
‘기다릴게요.’
기다리고 있을까.
정류장.
버스가 멈췄다.
정민이 내렸다.
마나시 중앙.
캐리어를 끌고 걸었다. 바퀴가 보도블록에 부딪혔다. 덜컹덜컹.
어디로 갈까.
숙소? 원룸은 정리했다. 파견 기간 동안 비워뒀다.
구청? 오늘은 일요일이다.
정민은 걸음을 멈췄다.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를 적었다.
정민: 도착했어요.
보냈다.
잠시 후 답이 왔다.
하린: 어디예요?
정민: 중앙 정류장.
하린: 거기 있어요.
하린: 갈게요.
정민은 벤치에 앉았다.
캐리어를 옆에 세웠다.
기다렸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일요일 오후.
가족들. 연인들. 쇼핑백을 든 사람들.
10분.
누군가 다가왔다.
정민이 고개를 들었다.
하린이었다.
한 달 만이었다.
하린이 서 있었다. 청바지. 흰 티셔츠. 가방. 큰 가방. 늘 들고 다니던.
한 달 전과 비슷했다. 하지만 달랐다.
머리가 짧아졌다. 어깨 위로.
얼굴이 야위었다. 조금. 광대뼈가 더 보였다.
“왔어요.”
하린이 말했다.
“네.”
정민이 일어났다.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하린이 정민을 봤다. 위아래로.
정민도 하린을 봤다.
“살 빠졌네요.”
하린이 말했다.
“그래요?”
“많이 걸었어요?”
“많이 걸었어요.”
정민이 말했다.
“하린 씨도 야위었어요.”
하린이 고개를 저었다.
“바빴어요.”
“뭐가요?”
하린이 잠깐 멈췄다. 뭔가 말하려다 멈췄다.
“나중에 얘기해요.”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잘랐네요.”
“지난주에요.”
“잘 어울려요.”
하린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빈말.”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금.
걸었다.
나란히.
캐리어 바퀴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보도블록 위로. 덜컹. 덜컹.
“어디 가요?”
하린이 물었다.
“몰라요. 숙소 정리 안 했어요.”
“오늘?”
“오늘 묵을 데요.”
하린이 생각했다.
“우리 집 근처에 민박 있어요. 거기 갈래요?”
“민박이요?”
“할머니가 하는 데요. 싸요. 깨끗하고.”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방향을 바꿨다.
마나브리지 쪽으로.
다리를 건넜다.
걸으면서.
강이 아래로 흘렀다. 물결이 반짝였다. 노을빛이 물에 반사됐다.
“한 달 반동안 뭐 했어요?”
하린이 물었다.
정민이 생각했다.
“걸었어요. 봤어요. 적었어요.”
“뭘요?”
“도시들이요. 어떻게 하는지.”
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고마웠어요.”
“받았어요?”
“다 받았어요. 다섯 개.”
정민이 기억을 떠올렸다.
아이비 하우스 합창. 사라의 집 빨간 문. 장의 서점 도장. 암스테르담 인도.
“도움이 됐어요?”
“몰라요. 근데 계속 생각했어요.”
하린이 강을 봤다.
“같은 날, 같은 시간. 나눠 갖게. 도장. 인도 폭.”
정민을 봤다.
“그게 가능해요? 여기서도?”
정민이 강을 봤다.
“모르겠어요.”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해볼 거예요.”
하림지구.
다리를 건너니 공기가 달랐다.
미래구의 유리와 LED가 사라졌다.
좁은 골목. 벽돌 건물. 낡은 간판.
정민은 걸으면서 봤다.
세탁소. 문 닫혀 있었다. 일요일이라.
분식집 자리. 빈 가게. 임대문의.
철물점. 아직 있었다. 간판이 더 낡았다.
한 달 사이에 바뀐 것들.
한 달 사이에 안 바뀐 것들.
암스테르담의 골목이 떠올랐다. 넓은 인도. 자전거 도로. 사람들.
여기는 달랐다. 인도가 좁았다. 오토바이가 지나다녔다.
50년.
시작도 안 했다.
골목 끝.
프래그먼트 자리.
정민이 멈췄다.
가게가 있었다.
하지만 달랐다.
간판이 바뀌어 있었다.
'프래그먼트’가 아니었다.
‘○○ 부동산’
정민이 하린을 봤다.
하린이 간판을 보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입술이 굳어 있었다.
“언제요?”
“2주 전이요.”
“…”
“어쩔 수 없었어요. 월세가 밀렸거든요.”
하린이 가게를 봤다.
유리창 너머. 책상. 의자. 부동산 매물 사진들.
예전에 테이블이 있던 자리. 벽에 사진이 있던 자리.
다 사라졌다.
“장부는요?”
정민이 물었다.
하린이 가방을 두드렸다.
“여기 있어요.”
“장판 붙은 거요?”
“네. 그건 안 버렸어요.”
걸었다.
다시.
골목을 지나.
하린이 말했다.
“정민 씨 없는 동안.”
“네.”
“저도 뭔가 해봤어요.”
정민이 하린을 봤다.
“뭘요?”
“작은 거예요. 별거 아닌데.”
하린이 걸으면서 말했다.
“상인회 사람들. 남은 사람들이요. 일곱 명.”
“네.”
“매주 모이기로 했어요.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정민이 걸음을 멈췄다.
“매주요?”
“네. 일요일 저녁. 여섯 시.”
하린이 정민을 봤다.
“정민 씨가 보낸 사진 때문이에요. 아이비 하우스. 매주 금요일. 12년.”
정민은 하린을 봤다.
“그래서 우리도 해보자고 했어요. 작은 거부터.”
하린이 웃었다. 작게.
“아직 3주밖에 안 됐어요. 세 번 만났어요. 근데요.”
“근데요?”
“다들 왔어요. 세 번 다.”
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이 뛰었다. 조금.
민박집에 도착했다.
작은 집. 2층. 낡았다. 문에 ‘민박’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하린이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가 나왔다.
“어머, 하린이네.”
“할머니, 친구가 하룻밤 묵어도 돼요?”
할머니가 정민을 봤다.
“먼 데서 왔어?”
“네.”
“들어와. 방 있어.”
2층.
작은 방.
침대. 책상. 창문. 창문으로 골목이 보였다. 가로등. 지붕.
정민이 캐리어를 놓았다.
하린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내일 뭐 해요?”
“구청 가야죠. 복귀 신고.”
“그다음은요?”
정민이 하린을 봤다.
“보여줄 게 있어요.”
“뭔데요?”
정민이 백팩을 열었다.
노트북을 꺼냈다.
“이거요.”
열었다. 켰다.
화면이 떴다.
‘베타시티 OS v0.1’
하린이 화면을 봤다.
“이게 뭐예요?”
“도시 운영 설명서요.”
“운영 설명서?”
“어떻게 굴릴지. 규칙들.”
하린이 화면을 읽었다.
90일 OS. 연접 3. 65% 룰. 3주 패스트트랙. 정의의 비용. 측정 방식.
“이게 한 달 반 동안 정리한 거예요?”
“네.”
하린이 정민을 봤다.
“이걸로 뭐 하려고요?”
정민이 창밖을 봤다.
골목. 낡은 건물들. 하림지구.
“실험하려고요.”
“어디서요?”
“마나밸리요.”
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나밸리요?”
“구도심이랑 신도심 사이. 완충지대.”
정민이 설명했다.
“하림지구는 너무 낡았어요.
미래구는 너무 새로워요.
둘 다 실험하기 어려워요.”
“그래서요?”
“그 사이가 있어요. 마나밸리.
공유주거. 마이크로비즈니스. 아직 뭔가 될 수 있는 곳.”
하린이 생각했다.
“거기서 시작하려고요?”
“네. 작게. 90일. 월 2회.”
정민이 하린을 봤다.
“혼자는 못해요.”
하린이 한참 동안 정민을 봤다.
정민도 하린을 봤다.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주황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린이 입을 열었다.
“장부 보여줄까요?”
“네?”
하린이 가방을 열었다.
장부를 꺼냈다.
낡은 장부. 표지에 뭔가 붙어 있었다.
장판 조각.
꽃무늬. 분홍과 연두. 색이 바랬다.
“여기요.”
하린이 장부를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
손글씨가 있었다.
‘기록을 기다리는 중.’
정민이 읽었다.
“이거…”
“정민 씨가 떠나던 날 적었어요.”
하린이 장부를 봤다.
“한 달 반동안 기다렸어요.”
정민이 하린을 봤다.
하린이 정민을 봤다.
“기록. 가져왔어요?”
정민이 노트북을 가리켰다.
“여기요.”
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요.”
장부를 덮었다.
“시작해봐요.”
창밖.
해가 졌다.
골목에 가로등이 켜졌다. 하나씩. 주황색 불빛.
정민은 창가에 섰다.
하린은 돌아갔다. 내일 보기로 했다.
저녁 여섯 시. 상인회 모임에 같이 가기로.
정민은 주머니에서 장판 조각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렸다.
꽃무늬. 닳은 표면. 40년.
한 달 전에 들고 떠났다.
한 달 동안 들고 다녔다.
런던. 클리블랜드. 파리. 암스테르담.
다시 여기로.
정민은 장판을 봤다.
“가져왔어.”
혼잣말이었다.
창밖을 봤다.
가로등 불빛. 골목. 하림지구.
저 너머에 마나밸리가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곳.
아니. 뭔가 될 수 있는 곳.
거기서 시작한다.
정민은 장판을 주머니에 넣었다.
노트북을 봤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 대기 모드.
손을 뻗었다. 키보드를 눌렀다.
화면이 켜졌다.
‘베타시티 OS v0.1’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깜빡. 깜빡.
도시의 심장박동 같았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깜빡였다. 접촉 불량.
깜빡. 깜빡.
같은 리듬이었다.
정민은 창문을 봤다.
유리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희미하게.
그 너머로 골목이 보였다. 가로등. 건물. 하늘.
마나시.
배우지 않았던 도시.
배울 수 있을까.
모른다.
모르니까 해보는 거다.
정민은 메모장을 꺼냈다.
펜을 들었다.
새 줄.
‘4월 29일. 마나시.’
‘버전 0.1 테스트 시작.’
‘첫 번째 실험: 상인회 정기 모임 참관.’‘내일 저녁 6시.’
적었다.
메모장을 덮었다.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
2부 끝. 계속.
[ 도시는 완벽해지지 않는다. 도시는 영원한 베타버전이다. ]
" 모르니까 해보는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