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도시의 잔향”
이 시나리오의 지문은
시각과 청각 너머의 감각을 포함합니다.
촉각, 후각, 온도, 질감. 촬영 지시가 아니라
이 공간이 어떤 감각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정한 것입니다.
감정 지문대신
배우의 손에 사물을 주고,
장면에 물리적 시간을 줬습니다.
S#1. 하림지구 4블록 철거지 외곽 / 3월초, 새벽 4시
검은 화면.
바람 소리가 먼저 들린다. 낮고 길게.
어둠 속에서 형체가 드러난다.
철망 펜스. 2미터 높이.
녹이 슬어 있다. 군데군데. 붉은 녹.
펜스에 안내문이 붙어 있다.
A4 크기. 비닐 코팅. 모서리가 말려 있다.
‘철거 일정 안내’
‘2027년 2월 15일 ~ 3월 31일’
‘문의: 미래구 도시재생본부’
글씨 일부가 번져 있다. 비에 젖었다 마른 자국.
펜스 너머로 빈 땅이 보인다.
콘크리트 바닥. 금이 가 있다.
갈라진 틈 사이로 잡초가 올라와 있다.
건물이 있던 자리. 지금은 없다.
기초만 남았다. 철근이 삐져나와 있다. 빨간 녹.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하림지구 4블록 재정비 사업’
‘미래구 도시재생본부’
흰 천에 파란 글씨. 모서리가 찢어져 있다.
바람에 펄럭인다. 퍼덕. 퍼덕. 젖은 소리.
정민(30대 초반)이 펜스 앞에 서 있다.
검은 코트. 단추를 잠그지 않았다.
운동화가 젖어 있다.
정민이 펜스를 잡는다.
철망이 차갑다. 손가락 끝으로 녹이 만져진다. 거칠다. 오돌토돌하다.
녹 냄새가 코로 올라온다. 쇠 냄새. 젖은 콘크리트 냄새.
정민의 시선이 현수막으로 간다.
‘미래구 도시재생본부.’
멈춘다. 2초.
펜스 한쪽이 찢어져 있다. 누군가 잘라놓은 것.
철사 끝이 날카롭다.
정민이 그 틈으로 안쪽에 들어간다.
발밑이 불안정하다.
벽돌 조각. 타일 부스러기. 유리 파편.
밟을 때마다 부서지는 소리. 사각. 서걱.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깨지는 감촉.
정민이 멈춘다.
건물이 있던 자리 한가운데쯤.
쪼그려 앉는다.
바닥에 뭔가 있다.
장판 조각. 손가락 세 개 크기.
꽃무늬. 빨간 꽃. 노란 잎. 색이 바래 있다.
정민이 그것을 집어 든다.
가볍다. 젖어 있다. 손가락 끝이 축축해진다.
뒤집어 본다.
뒷면에 접착제 자국. 누렇게 변해 있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문지른다. 천천히.
먼지가 묻어난다. 손가락 끝이 회색이 된다.
꽃무늬 위로 손가락 자국이 생긴다.
멈춘다.
본다. 3초.
정민이 장판 조각을 코트 주머니에 넣는다.
일어선다.
주위를 둘러본다.
콘크리트 바닥. 금. 풀. 잔해.
멀리 포클레인이 서 있다. 노란색. 움직이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먼지가 날린다.
코끝으로 탄 냄새가 스친다. 어디선가. 철거 현장 특유의 것.
정민이 눈을 감는다. 1초.
눈을 뜬다.
펜스 쪽으로 걷는다.
S# 2. 버스 안 / 새벽
버스 내부.
형광등이 켜져 있다. 흰 빛. 윙윙거린다.
창가 자리에 정민이 앉아 있다.
승객이 서너 명. 다들 졸고 있다.
버스가 달린다.
창밖으로 하림지구가 지나간다.
낮은 건물들. 2층. 3층. 대부분 낡았다.
셔터 내린 가게들. 가로등이 아직 켜져 있다. 주황색 불빛.
가게 앞에 빈 화분이 보인다.
플라스틱. 금이 가 있다. 흙이 말라 있다.
버스가 다리에 올라선다.
마나브리지.
창밖으로 강이 보인다. 마나강.
물이 회색이다. 새벽 하늘을 반사해서.
가로등 불빛이 수면 위에서 흔들린다.
다리를 건넌다.
미래구가 나타난다.
유리 건물들. 20층. 30층.
아직 불이 꺼진 곳이 많다.
천장 스피커에서 소리가 난다. 지직.
안내방송 : (V.O) 다음 정류장은, 미래구청, 미래구청입니다.
정민이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장판 조각이 손가락에 닿는다. 젖어 있다. 차갑다.
S# 3. 미래구청 정류장 / 새벽→아침
버스가 멈춘다.
정민이 내린다.
구청 건물이 보인다.
유리 건물. 15층.
지금은 불이 꺼져 있다.
건물 앞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미래구 – 시민과 함께하는 스마트 도시’
새 현수막. 글씨가 선명하다.
정민이 건물을 본다.
주머니에서 손을 뺀다.
장판 조각을 꺼낸다.
손바닥 위에 올린다.
꽃무늬가 희미하게 보인다.
젖어 있다. 차갑다.
정민이 그것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건물 쪽으로 걷는다.
동쪽 하늘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다.
회색에서 주황색으로.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