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 S#4 ~ S#10

1장 - “프래그먼트의 오후”

by 마나월드ManaWorld
main00.png 1장 - “프래그먼트의 오후”

중편 시나리오 -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S# 4. 구청 4층 도시재생과 사무실 / 1월 중순경, 오후

형광등이 윙윙거린다. 오래된 형광등.


복사기가 혼자 돌아간다. 위잉. 위잉.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종이가 쌓인다.


책상이 스물네 개. 네 줄로 배치.

절반은 비어 있다. 이른 시간이라서.


정민 자리. 창가 쪽. 네 번째 줄.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다.


휴대폰이 울린다. 진동.


정민이 휴대폰을 집어 든다.

화면을 본다.


문자.

‘상생협약 3년차 실태조사 대상 업소 목록 송부드립니다. 금주 내 현장 확인 요망.’


정민이 첨부파일을 연다.

21개 업소. 하림지구.


스크롤을 내린다.


열네 번째.

‘프래그먼트 / 카페 / 이하린 / 하림지구 4길 27-3.’


정민이 화면을 본다.

손가락이 멈춰 있다.


정민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일어난다.

가방을 든다.



S# 5. 버스 안 / 오후

버스가 마나브리지를 건넌다.


창밖.

미래구의 유리 건물들이 멀어진다.

새 건물들. 깨끗한 건물들. 유리에 햇빛이 반사된다.


다리를 건넌다.


하림지구가 가까워진다.

낡은 간판들. 색 바랜 차양들. 빨간색이 분홍색이 되어 있다.

셔터 내린 가게들.


전봇대에 ‘임대문의’ 전단이 붙어 있다.

여러 장. 겹쳐서. 아랫것은 비에 젖어 찢어져 있다.


정민이 창밖을 본다.


버스가 멈춘다.

정민이 내린다.



S# 6. 하림지구 4길 골목 / 오후

정민이 골목을 걷는다.


왼쪽.

세탁소. 철제 셔터가 내려져 있다.

셔터에 녹이 슬었다. 아래쪽에.

스티커가 붙어 있다. ‘THANK YOU 30년간 감사했습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 손글씨체.

스티커 끝이 말려 있다. 접착제가 마른 것.


셔터 앞에 빈 화분.

플라스틱. 금이 가 있다. 흙이 말라 있다. 아무것도 안 심어져 있다.


오른쪽.

빈 가게. 유리창에 종이. ‘임대문의.’ 전화번호.

아랫부분이 비에 젖어 번져 있다. 뒷자리 네 개를 알 수 없다.

유리창 안쪽에 먼지가 쌓여 있다. 발자국 하나 없다.


더 걷는다.


철물점. 김씨 철물점.

간판이 낡았다. 파란 바탕에 흰 글씨. 페인트가 벗겨져 있다.

‘철’ 자 위쪽이 희미하다.

안에 불이 꺼져 있다.

문에 종이. ‘잠시 외출.’ 손글씨. 테이프로 붙여놨다.


정민이 걷는다.


골목 끝.

간판이 보인다.

나무 간판. 손으로 쓴 글씨. 검은 글씨.

‘Fragment.’



S# 7. 카페 프래그먼트 앞 / 오후

정민이 카페 앞에 선다.


유리문.

안이 보인다.

작은 카페. 10평쯤.

테이블 네 개. 나무. 낡았다.

의자 여덟 개.

카운터 하나. 벽에 사진들. 흑백 사진들.


손님이 없다.


카운터 뒤에 여자가 있다.

하린(20대 후반~30대 초반).

머리를 묶고 있다. 검은 머리. 고무줄.

앞치마. 베이지색. 얼룩이 있다.

컵을 닦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행주로.


정민이 손잡이를 잡는다.

문을 연다.


종이 울린다. 딸랑. 작고 낮은 소리.

문에 달린 작은 종. 놋쇠. 오래된 것.



S#8. 카페 내부 / 오후

정민이 안으로 들어온다.


커피 냄새가 먼저 온다. 진하다.

그 아래로 오래된 나무 냄새. 약간 눅눅한 냄새. 세 겹으로 섞여 있다.


카운터 옆에 ‘임대 문의’ 전단이 놓여 있다. 살짝 접혀 있다.

하린이 그것을 손끝으로 민다. 서랍 쪽으로. 슬쩍.


하린이 고개를 든다.

정민을 본다.

컵을 닦던 손이 멈춘다.


하린 : 어서 오세요.


목소리가 평평하다. 환영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정민이 고개를 숙인다.


정민 : 안녕하세요. 구청 도시재생과…


하린 : 알아요.


하린이 말을 자른다.

컵을 내려놓는다. 카운터에. 딱. 나무 울림.


하린 : 3년 전에도 오셨잖아요.


정민이 입을 다문다.


하린 : 상생협약. 3년차 점검이죠. 맞죠?


정민 : …네.


하린이 한숨을 쉰다. 작게. 거의 안 들리게.


하린 : 앉으세요. 손님 없으면 이상해 보여요. 카페인데.


정민이 카운터 앞 의자에 앉는다.

나무 의자. 낡았다. 앉는 부분이 닳아 있다. 반들반들하다. 수백 번 앉아서 그렇게 된 것.

앉으면 삐걱 소리가 난다. 작게.


하린 : 뭐 드릴까요.


정민 : 아, 괜찮…


하린 : 주문 안 하시면 곤란해요. 매출이 필요하거든요. 진짜로.


웃지 않는다.


정민 : 아메리카노요. 뜨거운 걸로.


하린이 커피를 내린다.

원두를 간다. 드르륵. 기계 소리. 원두 냄새가 진해진다.

포터필터를 끼운다. 딸깍. 금속 소리.

버튼을 누른다.

커피가 내려온다. 천천히. 검은 액체. 김이 올라온다.


컵을 정민 앞에 놓는다. 도자기가 나무에 닿는 소리. 톡.


하린 : 4천원이에요.


정민이 카드를 낸다.

하린이 받는다. 단말기에 찍는다. 삑.


카드를 돌려준다.

손끝이 스친다. 하린의 손이 차갑다.

하린이 손을 뺀다. 빠르게.


정민이 커피를 마신다.

쓴맛. 진한 쓴맛. 혀끝이 얼얼하다.


정민 : 현재 매출 상황은 어떠세요?


하린이 컵을 닦는다. 행주가 컵 안쪽을 도는 소리. 끼익. 끼익.


하린 : …나쁘죠.


정민 : 구체적으로…


하린 : 구체적으로요?


하린이 컵을 내려놓는다.


하린 : 하루 손님 열 명 안 돼요. 좋은 날. 안 좋은 날은 다섯 명. 평균 객단가 5천원. 월 매출 150에서 200.


정민 : …


하린 : 임대료가 72만원이에요. 3년 전에는 45만원이었어요. 그다음 해 55만원. 작년에 72만원.


정민의 펜이 멈춘다.


하린 : 상생협약 가입하면 임대료 동결이라고 했잖아요. 건물주가 안 지켰어요.


정민 : …


하린 : 구청에 얘기했어요. 작년에.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정민이 입을 다문다.


하린 : ‘협약에 법적 구속력은 없습니다.’ 그러더라고요.


하린이 컵을 닦는다.


하린 : 다들 그래요. 죄송하다고. 근데 아무것도 안 바뀌어요.


정민이 대답하지 못한다.


하린이 벽을 본다.

사진들. 흑백. 80년대 골목. 사람들. 가게들. 간판들.


하린 : 우리 엄마가 찍은 거예요. 여기서 사진관 했거든요. 30년.


정민이 카운터를 본다.

나무 카운터. 나이테가 보인다. 오래된 나무. 손때가 묻어 있다.

모서리에 흠집이 있다. 깊은 것. 오래된 것. 손가락으로 만지면 패인 게 느껴질 것 같다.


하린 : 이 카운터도요. 엄마가 쓰던 거예요. 현상하던 테이블. 개조해서 카운터로 썼어요.


하린이 카운터를 손으로 쓴다. 천천히.

손가락이 나이테를 따라간다. 손끝이 나무결을 느끼는 것 같다.


하린 : 5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제가 이어받았어요. 사진관은 안 되니까 카페로 바꿨어요.


손을 뗀다.

손가락 끝을 본다. 1초.


하린 : 근데 카페도 안 되네요.


웃는다. 웃음 같지 않은 웃음.

입꼬리만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S# 9. 카페 - 정민 퇴장 / 오후

정민이 일어난다.


정민 :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하린 : 네.


정민이 가방을 든다.

문 쪽으로 간다.


하린 : 정민 씨.


정민이 돌아본다.


하린이 카운터에 서 있다. 컵을 들고.


하린 : 다음 주에 회의 있죠. 구청에서. 상생협약 평가회의.


정민 : …네.


하린 : 거기서 뭐라고 할 건데요.


정민이 대답하지 못한다.


하린이 컵을 닦는다.


하린 : …됐어요. 그냥 가세요. 보고서 쓰셔야죠.


정민이 문을 연다.

종이 울린다. 딸랑.


나간다.

문이 닫힌다.



S# 10. 골목 / 오후→저녁

정민이 골목에 서 있다.


해가 기울고 있다. 하늘이 주황색.

건물 사이로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온다.

골목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다.


정민이 프래그먼트를 돌아본다.

유리창 너머로 하린이 보인다.

컵을 닦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정민이 주머니에서 펜을 꺼낸다.

서류를 꺼낸다.


'프래그먼트 / 이하린 / 현황: ’


펜을 든다.

적는다.


‘유지 중.’


멈춘다.


‘임대료 인상 (45→55→72).’


멈춘다.


‘매출 감소.’


멈춘다.


‘협약 실효성 의문.’


마지막 문장을 쓰다가 펜이 멈춘다.

잉크가 종이에 번진다. 작은 점.


정민이 서류를 가방에 넣는다.


걷는다.




이 시나리오의 지문은

시각과 청각 너머의 감각을 포함합니다.

촉각, 후각, 온도, 질감. 촬영 지시가 아니라

이 공간이 어떤 감각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정한 것입니다.


감정 지문대신

배우의 손에 사물을 주고,

장면에 물리적 시간을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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