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새벽 네 시.
하림지구 4블록. 철거 예정지.
정민은 펜스 앞에 서 있었다.
운동화가 젖어 있었다. 새벽에 비가 왔다. 지금은 그쳐 있었다.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물 위에서 흔들렸다.
철망 사이로 안쪽이 보였다. 건물이 있던 자리. 지금은 없었다.
콘크리트 바닥만 남아 있었다. 금이 가 있었다.
풀이 틈 사이로 올라와 있었다. 잡초. 이름 모를 것들.
공기가 차가웠다. 3월이었지만 새벽은 아직 겨울이었다.
숨을 쉬면 하얗게 나왔다. 입에서 연기처럼.
냄새가 났다. 젖은 콘크리트. 녹슨 철.
어딘가에서 불에 탄 것 같은 냄새. 철거 현장 특유의 것.
도시가 사라지는 냄새였다.
정민은 펜스를 잡았다.
철망이 차가웠다. 손가락 끝으로 녹이 느껴졌다. 녹 냄새가 올라왔다.
펜스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하림지구 4블록 재정비 사업’‘미래구 도시재생본부’
정민이 속한 부서 이름이었다.
현수막 모서리가 찢어져 있었다. 바람에 펄럭였다.
펄럭일 때마다 천이 젖은 소리를 냈다.
현수막 아래에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A4 크기. 비닐 코팅.
‘철거 일정 안내’‘2025년 2월 15일 ~ 3월 31일’‘문의: 미래구 도시재생본부’
오늘이 3월 초였다. 철거가 한창이었다.
3주 전까지 여기 건물이 있었다.
2층짜리. 낡은 것. 1층은 칼국숫집이었다.
‘진옥이네 손칼국수’. 20년 된 가게.
정민은 그 가게를 알았다. 3년 전에 왔었다. 상생협약 설명회 때.
가게마다 돌았다. 골목마다 돌았다. 설명하고, 서류 나눠주고, 서명 받고.
이 칼국숫집도 그때 왔었다.
주인이 있었다. 오십 대 여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 손이 컸다. 반죽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았다.
“협약이요? 임대료 안 올린다는 거?”
여자가 물었었다.
“네. 5년 동안 동결이에요. 건물주분이 동의하시면.”
“진짜요?”
여자가 웃었었다. 주름이 깊었다. 눈가에.
“그럼 해야죠. 여기서 10년 더 하고 싶은데.”
그렇게 도장을 찍었다.
정민은 그 도장을 기억했다. 빨간 잉크. 네모난 것.
‘진옥이네 손칼국수’ 글씨가 새겨진.
3년이 지났다. 협약은 끝났다. 임대료가 올랐다.
가게는 닫혔다. 건물은 철거됐다.
지금 그 자리에 콘크리트 바닥만 남아 있었다.
정민은 펜스 옆으로 걸었다.
한쪽이 찢어져 있었다. 누군가 잘라놓은 것.
펜치로 자른 것 같았다. 철사 끝이 날카로웠다.
그 틈으로 안쪽에 들어갔다.
발밑이 불안정했다. 잔해가 있었다.
벽돌 조각. 타일 부스러기. 유리 파편.
운동화 밑창으로 뭔가 부서지는 느낌이 났다. 사각사각.
천천히 걸었다.
동쪽 하늘이 조금 밝아지고 있었다.
아직 해는 안 떴다. 회색 하늘.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건물이 있던 자리 한가운데쯤에서 멈췄다.
여기가 칼국숫집 주방이었을 것이다. 아니, 홀이었을 수도 있다.
알 수 없었다. 다 무너졌으니까.
발밑에 뭔가 있었다.
쪼그려 앉았다.
손을 뻗었다.
장판 조각이었다.
손가락 세 개 크기. 직사각형.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꽃무늬가 있었다. 빨간 꽃. 노란 잎. 색이 바래 있었다. 원래는 더 선명했을 것이다.
정민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가벼웠다. 젖어 있었다. 새벽 비 때문에.
뒤집어 보았다. 뒷면에 접착제 자국이 있었다.
누렇게 변해 있었다. 오래된 것. 20년쯤 된 것.
손가락으로 표면을 문질렀다. 먼지가 묻어났다.
손가락 끝이 회색이 됐다. 꽃무늬 위로 손가락 자국이 생겼다.
이 장판 위를 누가 걸었을까.
아침에 일어나 맨발로.
저녁에 지쳐서 발을 끌며.
아이가 뛰었을 수도 있다.
국수 먹으러 온 손님이 신발 벗고 올라왔을 수도 있다.
주인 여자가 걸레 들고 닦았을 수도 있다.
20년. 그 시간이 이 조각 안에 있었다.
사람은 바닥을 잘 보지 않는다. 밟고 지나갈 뿐이다.
그 위에 뭐가 있었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도시도 그렇다. 그 위에 누가 살았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정민은 장판 조각을 손에 쥔 채 일어섰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콘크리트 바닥. 금. 풀. 잔해. 멀리 포클레인이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곧 움직일 것이다.
건물은 사라졌다. 사람은 떠났다. 기억은 남지 않았다.
도시는 이렇게 사라진다. 소리 없이. 냄새만 남기고. 그마저도 비가 오면 씻겨 내려간다.
정민은 장판 조각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젖은 조각이었다. 주머니 안쪽이 축축해질 것이다. 상관없었다.
주머니 안에서 손가락이 모서리를 만졌다.
닳은 가장자리. 꽃무늬의 돌기. 접착제 자국의 거친 면.
펜스 쪽으로 걸었다.
찢어진 틈 사이로 빠져나왔다.
철사에 코트 자락이 걸렸다. 당겼다.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작게.
큰길로 나왔다.
하늘이 조금 더 밝아져 있었다.
동쪽이 회색에서 남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곧 해가 뜰 것이다.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버스를 기다렸다.
새벽 첫 버스. 5시 20분. 아직 10분 남았다.
정류장 벤치에 앉지 않았다. 젖어 있었다. 서서 기다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장판 조각이 손가락에 닿았다.
차가웠다. 새벽 공기만큼. 젖어 있어서 더 차가웠다.
정민은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만지고 있었다.
버스가 왔다.
헤드라이트가 밝았다. 눈이 부셨다.
탔다.
버스 안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새벽이라서. 서너 명. 다들 졸고 있었다.
정민은 뒤쪽에 앉았다. 창가 자리.
버스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하림지구가 지나갔다.
낮은 건물들. 셔터 내린 가게들. 가로등이 아직 켜져 있었다.
주황색 불빛. 새벽빛과 섞여서 이상한 색이 됐다.
골목이 스쳐 지나갔다. 어제 걸었던 골목.
그제 걸었던 골목. 3년 전에 걸었던 골목.
다 비슷해 보였다. 낮고, 좁고, 오래된.
버스가 마나브리지를 건넜다.
다리. 강 위를 지나는.
마나강이 보였다. 폭이 넓었다. 200미터쯤.
물이 회색이었다. 새벽 하늘을 반사해서. 빛이 수면 위에서 흔들렸다. 잔잔하게.
다리 난간에 가로등이 있었다. 아직 켜져 있었다. 주황색.
다리를 건너는 데 2분쯤 걸렸다.
다리를 건너자 미래구가 나타났다.
유리 건물들. 높은 것들. 20층. 30층. 하늘을 찌르는 것들.
아직 불이 꺼진 곳이 많았다. 새벽이라서. 곧 켜질 것이다.
버스 천장 스피커에서 소리가 났다. 지직.
‘다음 정류장은, 미래구청, 미래구청입니다.’
정민은 주머니 속 장판 조각을 놓지 않았다.
미래구청 정류장에서 내렸다.
구청 건물이 보였다. 유리 건물. 15층. 정민이 6년 동안 출근한 곳.
지금은 불이 꺼져 있었다. 새벽이니까.
정민은 건물을 보았다.
6년.
신입으로 들어왔다.
현장 조사 다녔다.
보고서 썼다. 협약 만들었다. 숫자 정리했다.
그 6년이 저 건물 안에 있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장판 조각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렸다.
젖어 있었다. 차가웠다. 꽃무늬가 희미하게 보였다.
20년 된 바닥. 사라진 가게. 떠난 사람.
정민은 그것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건물 쪽으로 걸었다.
동쪽 하늘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도시는 죽지 않는다.
다만 배우지 않을 뿐이다.
-25.12.19 오후에 계속-
[사람은 바닥을 잘 보지 않는다. 밟고 지나갈 뿐이다. 도시도 그렇다. 그 위에 누가 살았는지 기억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