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기타

소설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1장: 프래그먼트의 오후

by 마나월드ManaWorld
main.png 1부 1장 - 프래그먼트의 오후

오후 두 시.

정민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구청 4층. 도시재생과.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오래된 형광등. 3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구청 내부 문자.

[‘상생협약 3년차 실태조사 대상 업소 목록 송부드립니다. 금주 내 현장 확인 요망.’]

첨부파일을 열었다.

21개 업소. 하림지구.

3년 전에는 47개였다. 지금은 21개.

절반이 넘게 사라졌다.

스크롤을 내렸다.

열네 번째.

‘프래그먼트 / 카페 / 이하린 / 하림지구 4길 27-3.’

정민은 화면을 봤다.

프래그먼트.

3년 전에 갔었다. 상생협약 가입 권유.

작은 카페. 벽에 오래된 사진들.

카운터에 서 있던 여자. 이하린. 서른 즈음. 피곤해 보였다.

아무 말 없이 사인했다. 펜을 내려놓을 때 손끝이 떨렸었다.

3년.

아직 있구나.

정민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일어났다.

가방을 들었다.


버스를 탔다.

창가에 앉았다.

마나교를 건넜다. 미래구의 유리 건물들이 멀어졌다.

새 건물들. 깨끗한 건물들. LED 간판들.

다리 중간.

왼쪽에 미래구. 오른쪽에 하림지구.

같은 도시. 다리 하나 차이.

하림지구가 가까워졌다.

낡은 간판들. 색 바랜 차양들. 셔터 내린 가게들.

내렸다.


걸었다.

하림지구 4길.

3년 전에도 이 길을 걸었다. 그때는 몰랐다. 뭘 봐야 하는지.

지금은 보였다.

왼쪽. 세탁소.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THANK YOU 30년간 감사했습니다.’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스티커 끝이 말려 있었다.

3년 전에는 열려 있었다.

아주머니가 다리미질을 하고 있었다. 스팀 소리가 났었다.

오른쪽. 빈 가게. 유리창에 종이. ‘임대문의.’ 전화번호.

아랫부분이 비에 젖어 번져 있었다.

3년 전에는 분식집이었다. 떡볶이 냄새가 났었다. 지금은 먼지 냄새만.

더 걸었다.

철물점. 김씨 철물점. 아직 있었다. 간판이 낡았다.

안에 불이 꺼져 있었다. 문에 종이. ‘잠시 외출.’

7년 전에 처음 왔었다. 신입 때. 상인회 가입 권유.

김 사장이 드라이버를 들고 있었다.

“마케팅 해서 올 손님이 없어요.”

그때 대답을 못 했다. 지금도 대답을 못 한다.

더 걸었다.

골목 끝.

간판이 보였다.

나무 간판. 손으로 쓴 글씨. ‘Fragment.’

프래그먼트.


정민은 카페 앞에 섰다.

유리문.

안이 보였다.

작은 카페. 테이블 네 개. 의자 여덟 개. 카운터 하나. 벽에 사진들. 흑백 사진들.

손님이 없었다.

카운터 뒤에 여자가 있었다.

이하린.

3년 전보다 야위어 보였다. 머리를 묶고 있었다.

앞치마. 컵을 닦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정민은 잠깐 서 있었다.

들어가야 했다. 실태조사. 해야 할 일.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었다.



종이 울렸다.

딸랑.

문에 달린 작은 종. 놋쇠. 오래된 것.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 안.

커피 냄새. 오래된 나무 냄새. 약간 눅눅한 냄새.

벽 사진들이 가까이 보였다. 흑백. 오래된 사진들.

하림지구 골목. 70년대? 80년대?

카운터 뒤에서 하린이 고개를 들었다.

정민을 봤다.

컵을 닦던 손이 멈췄다.

“…”

잠깐.

“어서 오세요.”

목소리가 평평했다. 환영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계적인 인사.

정민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구청 도시재생과…”

“알아요.”

하린이 말을 잘랐다.

컵을 내려놓았다. 카운터에. 딱.

정민을 봤다.

“3년 전에도 오셨잖아요.”


정민은 입을 다물었다.

하린이 기억하고 있었다.

“상생협약.”

하린이 말했다.

“3년차 점검이죠. 맞죠?”

“… 네.”

하린이 한숨을 쉬었다. 작게. 거의 안 들리게.

컵을 다시 들었다. 닦기 시작했다.

“앉으세요.”

“…”

“손님 없으면 이상해 보여요. 카페인데.”

정민은 카운터 앞 의자를 봤다.

나무 의자. 낡았다. 앉는 부분이 닳아 있었다.

앉았다.

가방을 무릎 위에 놓았다.

하린이 컵을 닦았다. 말이 없었다.

카페 안이 조용했다. 형광등 소리만. 지지직. 오래된 형광등.

“뭐 드릴까요.”

하린이 말했다. 돌아보지 않고.

“아, 괜찮…”

“주문 안 하시면 곤란해요.”

하린이 돌아봤다.

정민을 봤다.

“매출이 필요하거든요. 진짜로.”

웃지 않았다.


“아메리카노요. 뜨거운 걸로.”

정민이 말했다.

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렸다. 커피 머신 쪽으로.

원두를 갈았다. 드르륵. 기계 소리.

포터필터를 끼웠다. 딸깍.

버튼을 눌렀다.

커피가 내려왔다. 천천히. 검은 액체. 컵에.

정민은 하린의 손을 봤다.

마른 손. 손등에 핏줄이 보였다. 손가락이 가늘었다. 손톱이 짧았다.

컵을 닦고, 커피를 내리고, 카페를 운영하는 손.

하린이 컵을 들고 왔다.

정민 앞에 놓았다.

“4천원이에요.”

정민이 지갑을 꺼냈다. 카드를 내밀었다.

하린이 받았다. 단말기에 찍었다.

삑.

카드를 돌려줬다.

손끝이 스쳤다.

하린이 손을 뺐다. 빠르게.


정민이 커피를 마셨다.

쓴맛. 진한 쓴맛.

컵을 내려놓았다.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몇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

하린이 카운터 안으로 돌아갔다. 또 컵을 들었다. 닦기 시작했다.

“네.”

정민이 펜을 들었다.

“현재 매출 상황은 어떠세요?”

하린이 컵을 닦았다.

닦았다.

“… 나쁘죠.”

“구체적으로…”

“구체적으로요?”

하린이 컵을 내려놓았다.

정민을 봤다.

“하루 손님 열 명 안 돼요. 좋은 날. 안 좋은 날은 다섯 명.”

“…”

“평균 객단가 5천원. 월 매출 150에서 200. 잘 되면 200. 안 되면 150도 안 돼요.”

정민이 펜을 움직였다. 숫자를 적었다.

“임대료가 72만원이에요.”

펜이 멈췄다.

“3년 전에는 45만원이었어요.”

정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다음 해 55만원. 작년에 72만원.”

“…”

“상생협약 가입하면 임대료 동결이라고 했잖아요.”

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린이 다시 컵을 들었다.

“건물주가 안 지켰어요. 세금이 올랐다고. 자기 사정이 있다고.”

닦았다.

“구청에 얘기했어요. 작년에.”

“…”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정민은 알았다.

알고 있었다.

하린이 말했다.

“‘협약에 법적 구속력은 없습니다.’”

컵을 닦았다.

“그러더라고요. 구청 담당자가.”

“…”

“그 담당자. 누군지 알아요?”

정민이 입을 다물었다.

하린이 정민을 봤다.

“모르면 됐어요.”

컵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다 똑같으니까. 구청 사람들.”

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작년 담당자. 누구였지. 기억이 안 났다.

아니, 기억나지 않으려고 했다. 자기였을 수도 있었다.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정민은 벽을 봤다.

사진들.

흑백. 오래된 사진들. 하림지구 골목.

80년대 골목. 사람들이 있었다. 가게들이 있었다. 간판들. 웃는 얼굴들.

“80년대예요.”

하린이 말했다.

정민이 돌아봤다.

하린은 정민을 보지 않았다. 사진을 보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찍은 거예요.”

“…”

“여기서 사진관 했거든요. 여기. 이 자리. 30년.”

정민이 카운터를 봤다. 나무 카운터. 나이테가 보였다. 오래된 나무.

“이 카운터도요?”

“네.”

하린이 카운터를 손으로 쓸었다. 천천히.

“엄마가 쓰던 거예요. 그때 사진 현상하던 테이블. 개조해서 카운터로 썼어요.”

“…”

“5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제가 이어받았어요.”

정민은 말이 없었다.

하린이 손을 뗐다.

“사진관은 안 되니까. 카페로 바꿨어요. 그게 5년 전.”

“…”

“근데 카페도 안 되네요.”

웃었다. 웃음 같지 않은 웃음.


정민이 서류를 봤다.

‘상생협약 체결 업소 현황.’

‘임대료 동결 약정.’

‘분쟁 발생 시 상호 협의.’

종이 위의 글자들.

글자는 있었다. 효력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정민이 말했다.

하린이 정민을 봤다.

“…”

“뭐가요.”

“…”

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린이 컵을 들었다. 닦았다.

“뭐가 죄송한 건데요.”

“…”

“임대료 올린 건 건물주예요.

법적 구속력 없다고 한 건 구청이에요. 당신이 뭘 잘못했는데요.”

정민은 입을 다물었다.

하린이 컵을 닦았다.

닦았다.

“… 당신 잘못 아니에요.”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 동네가 그런 거죠. 이 도시가 그런 거죠.”

몸을 돌렸다. 커피 머신 쪽으로.

“다들 그래요. 죄송하다고. 근데 아무것도 안 바뀌어요.”


정민은 커피를 마셨다.

다 식었다. 찬 커피. 쓴맛.

“저기 철물점 아시죠.”

정민이 말했다.

하린이 돌아봤다.

“김씨 철물점요?”

“네.”

“알죠. 어릴 때부터 봤어요. 김 사장님.”

정민이 컵을 내려놓았다.

“7년 전에 갔었어요. 제가.”

“…”

“처음 발령받았을 때. 상인회 가입 권유하러.”

하린이 말이 없었다.

“마케팅 하면 손님 온다고 했어요. 제가.”

정민이 컵을 봤다. 빈 컵. 바닥에 커피 자국.

“김 사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손님이 없는데 무슨 마케팅이냐고.”

“…”

“대답을 못 했어요.”

하린이 컵을 내려놓았다.

정민을 봤다.

“7년이요?”

“네.”

“7년 동안 여기서 일했어요?”

“… 네.”

하린이 고개를 저었다. 작게.

“… 힘드시겠네요.”

정민이 고개를 들었다.

하린이 웃고 있었다. 웃음 같지 않은 웃음. 아까와 같은.

“죄송하다고만 하면서 7년. 그것도 일이네요.”


정민이 일어났다.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네.”

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이 가방을 들었다.

서류가 가방 안에 있었다.

'프래그먼트 / 이하린 / 현황: ’

빈칸.

“저기.”

하린이 말했다.

정민이 돌아봤다.

하린이 카운터에 서 있었다. 컵을 들고.

“다음 주에 회의 있죠. 구청에서.”

“… 네.”

“상생협약 평가회의.”

“네.”

하린이 컵을 봤다.

“거기서 뭐라고 할 건데요.”

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린이 컵을 닦았다.

“… 됐어요.”

닦았다.

“그냥 가세요. 보고서 쓰셔야죠.”


정민이 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았다.

뒤를 돌아봤다.

하린이 카운터에 서 있었다. 컵을 닦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카페 안.

테이블 네 개. 빈 의자들. 벽의 사진들. 80년대 골목.

형광등이 지지직거렸다.

정민이 문을 열었다.

종이 울렸다. 딸랑.

나갔다.

문이 닫혔다.



골목에 섰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오후 네 시쯤.

정민은 프래그먼트를 돌아봤다.

나무 간판. ‘Fragment.’

유리창 너머로 하린이 보였다.

카운터에 서 있었다. 컵을 닦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정민은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서류를 꺼냈다.

'프래그먼트 / 이하린 / 현황: ’

펜을 들었다.

적었다.

‘유지 중.’

멈췄다.

적었다.

‘임대료 인상 (45→55→72).’

멈췄다.

적었다.

‘매출 감소.’

멈췄다.

‘협약 실효성 의문.’

마지막 문장을 쓰다가 펜이 멈췄다.

이걸 보고서에 쓸 수 있을까.

쓰면 뭐가 바뀔까.

정민은 서류를 봤다.

잉크가 마르고 있었다.

잉크 냄새.

서류를 가방에 넣었다.

걸었다.


버스 정류장.

버스를 기다렸다. 다섯 분.

버스가 왔다.

탔다. 카드를 찍었다. 삑.

창가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했다.

창밖을 봤다.

하림지구가 멀어졌다.

세탁소. 셔터 내린. 빈 가게. 임대문의. 철물점. 불 꺼진.

골목이 작아졌다.

마나교에 올랐다.

다리.

왼쪽. 하림지구. 낡은 지붕들.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른쪽. 미래구. 유리 건물들. 불이 켜지고 있었다.

같은 도시.

다리 하나 차이.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

[미정: 다음 주 평가회의 자료 검토 부탁. 통계 이상한 데 있으면 알려줘.]

정민은 화면을 봤다.

통계 이상한 데.

창밖을 봤다.

마나교를 건너고 있었다.

하림지구가 멀어지고 있었다.

미래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방 안에 서류가 있었다.

‘협약 실효성 의문.’

이걸 보고서에 올리면?

올리면 뭐가 바뀔까.

버스가 다리를 건넜다.


-계속-



"3년 전에도 오셨잖아요."

"그 담당자. 누군지 알아요?"

"엄마가 쓰던 거예요. 그때 사진 현상하던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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