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늘 앉아야만 하는 자리가 있다.
하지만 마음속 발끝은 늘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혹시, 당신도 그러한가
언젠가, 우리의 발끝이 동시에 공중을 향하길
(황지우 시인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읽고 오시면 더욱 도움이 됩니다.)
체육대회 날, 우리는 나란히 줄을 서서 응원 춤을 연습했다. 내 발목은 그 리듬에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반발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들 하는데 나만 빠지면 안 된다는 말. 폭력 없는 폭력적 시선들이 나를 가볍게, 그러나 견고하게 옭아맸다. 나는 매번 의례의 대열 속으로 끌려갔다. 축제 합창, 스승의 날 회비, 반 티셔츠. 어린 날의 나는 이미 훈련 받고 있었다. 반항을 삼키고, 눈빛을 낮추는 법을 말이다.
어른이 된 지금, 의례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교묘해졌다. 결혼식 떡 돌리기, 회식 자리,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다들 이렇게 살아."라는 문장. 그 말은 의자처럼 묵직하게 내 옆에 놓인다. 나는 그 의자에 강제로 앉혀진다. 잠시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는 시늉만 할 뿐, 끝내 등을 기대고 말게 만드는 의자.
의례가 끝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면 나는 극심한 부적절감을 느낀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속 주인공이 그러했다. 특별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녀를 특이함이라는 이름 속에 가둬두고, 평범함의 수평선 아래로 끌어내리려고 했다. 그 수평선 위에 억지로 눕혀진 몸. 고개를 조금만 들면 보이는 낮고 먼 하늘.
내 몸이 눕혀진 이곳이 낯설다. 이 동네, 이 나라, 이 지구별은 나에게 마치 잠시 들른 대합실 같다. 사람들은 모두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듯 앉아 있지만, 표는 이미 오래전에 반납해버린 듯한 얼굴들이다. 나 역시 그들 옆에 앉아 있지만, 발끝은 다른 방향을 향한다.
그럴 때, 창밖으로 새떼가 난다. 을숙도의 갈대숲 같은 어딘가에서, 흰 날개들이 일제히 떠오른다. 그들은 서로의 발목을 묶지 않는다. 같은 방향을 향하지만, 같은 거리를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다. 공기를 짓는 그들의 날갯짓은, 단 한 번도 주저앉는 법을 배우지 않은 몸짓 같다.
나는 가끔 꿈꾼다. 우리가 모두 일제히 의자에서 일어나, 대열을 버리고 문을 나서는 순간을.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발에는 소리의 그림자만 남긴 채, 의례의 바닥 대신 공기를 밟는 그 순간을. 우리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어디론가 떠나는 순간을.
하지만 꿈이 끝나면 나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그러고는 애써 모른 척하며 서로의 무릎 위로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준다. 먼지 속에서 언뜻 깃털을 본 듯한 착각을 한다. 그것이 착각인지, 아직 남아 있는 증거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언젠가, 우리의 발끝이 동시에 공중으로 향하길 바랄 뿐이다.
(사진출처: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