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지 않기에 더욱 선명해지는 순간

에세이

by 이재 다시 원


부적합함은 결핍이 아니라, 내가 나라는 증거다


나는 종종 이 세상에 맞지 않는 듯한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고립된 듯 외딴 곳에 떠 있는 감각. 모두가 웃는 순간에도 웃을 수 없어 나만 엇박자를 타듯 자꾸만 어긋나는 듯한 감각. 마치 세계의 리듬과 내 호흡이 어긋나 있다는 자각이 찾아올 때, 나는 내가 이 자리에 잘못 끼워진 존재인 것처럼 느껴진다.


카뮈는 인간을 부조리한 존재라 봤다. 우리는 언제나 삶의 의미를 갈구하지만, 세계는 묵묵히 침묵한다. 대답 없는 세계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어긋나 있다. 내가 느끼는 부적합함 역시, 이 부조리의 증거일 것이다. 타인과 나, 사회와 나, 심지어 나 자신과 나 사이에도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 그것은 결코 극복되지 않는 균열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라고 했다. 나를 구속하는 규범이 불편한 이유는 내가 자유롭기 때문일까. 세계와 완전히 맞물리는 순간이 오지 않는 이유는 내가 언제나 선택을 통해 나 자신을 빚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형벌이고, 부적합함은 자유의 그림자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이 실존의 증거라 했다. 내가 느끼는 이 부적합함은 단순한 약점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묻고 있다는 증거이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왜 나는 다르다고 느끼는가?"


이 질문은 불안을 동반하지만, 그 질문 속에서만 인간은 실존한다.


존재는 본래 이 세계와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다. 어긋남은 흠결이 아닌 조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적합함 속에서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자각한다. 내가 세계에 흡수되지 않고 틈을 남길 때, 그 틈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나다움을 보존하는 유일한 자리다.


나는 여전히 이 세계에서 어딘가 어긋난 채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어긋남이 결핍이 아니라 증거임을 안다. 존재의 부적합함은 나를 고립시키지만, 동시에 나를 나로 만든다. 세계와의 틈. 그 어긋난 자리에 서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실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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