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함은 내 본질이 아니었다

에세이

by 이재 다시 원


나는 내 안에 작은 죄인 하나를 키워왔다.
그는 늘 나보다 작고, 나보다 먼저 고개를 숙였다.


칭찬을 받아도 그 말에

"아니에요. 전 아직 멀었죠." 라고 하고

누군가 나를 부러워하면

"운이 좋았어요." 라며

나는 내 말 속에 부정과 겸손을 가장한 두려움을 숨기곤 했다.


스스로를 작게 말하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워버렸다. 누가 나를 해치기도 전에 먼저 나를 작게 접어 타인의 눈에 들기 편한 크기로 내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비루함을 미덕이라 착각했다. 비우고, 양보하고, 숨죽이고, 사라지는 것. 그게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의 방식이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나 자신으로 사는 법을 잃어갔다. 내 삶을 살면서도 내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나는 '나'를 연기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해롭지 않은 인간의 모양. 타인의 기대에 꼭 맞는 크기. 바람 빠진 인간의 모습으로.


니체는 이를 노예 도덕이라 불렀다. 강함과 힘, 생의 충일함을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가리고, 스스로를 피해자로 위치시켜 존재를 정당화하는 방식. 그 도덕은 나를 보호하는 척하면서 내 가능성을 철저히 가둬왔다. 나는 착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분노를 억눌렀고, 부드럽다는 말을 듣기 위해 내 열망을 삼켰다. 무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 끝없이 나를 지웠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기쁨이란 능동성에서 비롯되고, 슬픔은 수동성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기쁨을 잃고 있었다. 삶의 주어가 아니라 늘 목적어처럼 반응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왜 나는 항상 사과하듯 존재하는가. 왜 나의 말은 늘 나를 깎는 말로 시작되는가. 왜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누군가의 인정을 통해서만 확신받으려 하는가.


나는 내 안의 작은 죄인을 보내줄 수 있을까. 그를 더는 미덕이라 부르지 않고, 더는 사랑하지 않으며, 더는 나인 척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루함은 나의 본질이 아니었다. 나는 살아 있는 존재이며 내 삶의 유일한 증인이고, 나라는 세계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시선이다.


나는 고개를 들고 말하며, 걷고, 쓰고, 사랑하고 싶다. 누구의 허락도 아닌 내 의지로. 그것이 비로소 나로 사는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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