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결심하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by 하만다

피부과에 갔다. 회사에는 병원 진료로 조금 늦게 출근한다고 말해 두었다.


이주 전인가, 입술과 손등에 물집이 났다. 간혹 손에 물집이 잡히곤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왜 이런 게 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입술에 잡힌 물집이 혹시나 헤르페스가 아닐까 싶어 겸사겸사 집 근처 병원을 찾았었다. 의사는 피부를 슬쩍 보더니 헤르페스는 아니고 습진의 일종인데 약 처방을 해줄 테니 바르라더라. 특별히 먹는 걸 조심하라거나 생활 습관을 바꾸라거나 하는 조언은 듣지 못했는데 나 또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의사의 말대로 아침저녁으로 꾸준히 약을 바르고 저녁에는 약이 잘 스며들도록 비닐장갑까지 끼고 잤는데 어째 물집과 간지럼증이 더 심해지더니 점점 온몸으로 번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손목부터 발목까지 온통 빨간 반점이다. 다행인 것은 얼굴에는 나지 않는다는 것 정도랄까. 심해진 증세 때문에 다시 찾은 병원에서 의사는 처방해준 약을 계속 바르고 더 심해지면 더 센 약을 처방해 주겠다고 했다. 맙소사. 이게 말인가 막걸리인가. 원인을 말해주지도 않고 증세 완화 방법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더 심해지면 더 강한 약을 바르면 된다니. 내 몸이 실험 대상도 아니고 말이다. 피부과를 간다니 무엇인가 못 미덥게 바라보던 남자 친구가 왜 그랬는지 그제야 알 것도 같았다.


온통 빨간색으로 뒤덮인 내 피부를 보자니 문득 내가 회사를 그만둘 때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아니, 그보다는 확신이 들었달까. 몸이 부쩍 안 좋아진 요즘이었다. 누군가는 나이가 들어 그렇다고 말하겠지만 작년 여름 자궁 근종 수술부터 올해 초 건강 검진 결과에서 들은 백혈구 수치 저하와 갑상선 호르몬 이상까지 폭풍처럼 몰아친 건강 이상 때문에 여러모로 걱정되었었다. 지난겨울에는 눈 떨림 때문에 한동안 괴로웠었고 올해부터 갑자기 시작된 복부 통증과 속 쓰림 증상은 만성 위염으로 판정받았다. ‘건강’하면 꽤 자신감 있던 나였는데, 온갖 스트레스에도 끄떡없던 나였는데, 이제는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어찌 됐건 내 몸이 말하고 있다. 그만 좀 쉬라고.


나는 건강 관리에 관심은 많지만 막상 하기는 귀찮아하는 게으른 성격 때문에 괴로워하는 편이다. 운동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아서,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먹지 않아서, 일찍 자야 하는데 밤에 더 활성화되는 뇌세포와 손가락 신경 때문에 새벽 1~2시에나 잠이 들어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원래도 게으른 성격이라 시간이 있어도 해내기 힘든 건강 관리가 재작년부터 시작된 대학원 공부 덕택에 개인 시간까지 부족해서 더욱 어려워졌다. 대학원 수업을 들으려고 일을 다 마치지 못한 채로 퇴근하면 수업이 끝나고 집에서 다시 회사 일을 한다. 빌어먹을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 환경이 잘 되어 있어 회사를 가지 않고 집에서도 업무를 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꾸역꾸역 피곤한 몸을 이끌고 책상 대신 화장대에 앉아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밤 11시다. 일은 다 못 마쳤지만 ‘이렇게 살 순 없다’고 생각하며 내일의 나에게 일을 맡기고 노트북을 꺼버린다. 그러고 나면 건강 식단이고 뭐고 스트레스 풀 매운 닭발에 주먹밥까지 주문해 먹고 침대에 널브러지기 일쑤다. 내 진짜 하루는 지금부터이니 잠들 순 없고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보며 킥킥대다 새벽 2시를 가리키는 시계 때문에 놀라 잠에 든다. 이런 생활을 몇 년째 하고 있는데 건강할 리가 있나. 이 루틴은 내 몸을 망쳤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정신적 스트레스는 더했다.


스트레스의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나는 이 심해지고 있는 내 몸의 빨간 반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피부과에 앉아 있는 것이다. 지난번 진료를 받았던 병원에서는 의사에 대한 신뢰가 와르르 무녀져 버린 상태라 피부과 질환을 잘 봐준다는 피부과를 수소문해 회사 근처에 있는 병원 하나를 찾았는데 어떨지는 모르겠다. 오늘은 부디 내 병에 조금의 관심이라도 보여 주는 의사 선생님이길 바라면서 내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다.


“만다 님, 1번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1번 진료실은 그 이름답게 대기 공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맑고 명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뭐랄까, 인사말밖에 듣지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예감이 좋았다. 짧은 커트 머리에 얇은 검은색 뿔떼안경을 쓴 이 선생님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증상을 말하니 피부를 보자면서 이곳저곳 꼼꼼히 봤다. 내가 엉덩이 밑이 가장 심하다고 하니 거기도 봐야겠다면서 내 손보다 빠르게 바지를 내릴 땐 좀 당황하긴 했지만 대체로 사려 깊고 친절한 분인 것 같았다. 이 지독한 피부 질환의 병명은 ‘장미색 비강진’으로, 대부분이 원인 불명이고 증상은 몸통을 중심으로 빨간색 반점들이 마치 샤워할 때 물이 떨어지듯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데 특히 겨드랑이나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 등 살이 겹치는 곳에 더 많이 생긴다고 했다. 보통은 두 달 안에는 그 증세가 가라앉는데 너무 심해지지 않도록 약을 줄 테니 잘 먹고 잘 바르라고. 다만, 증상이 심해지면 상급 병원으로 가야 될 수 있다고 했다. 제발 그럴 일은 없길 바래본다. 아니지, 상급 병원에 가면 ‘내 몸의 상태가 이렇게 심각해 더 이상 일은 못해먹겠습니다’라는 아무도 붙잡지 못할 핑계를 대며 퇴사할 수 있으니 오히려 좋은 일일까 싶다. (이렇게 회사는 내가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곤 한다.)


먹는 약에 바르는 약까지 봉투 두둑하게 약을 받아 들고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지만 경쾌하다. 나는 오늘 퇴사를 결심했다. 회사에 가서 바로 말해야지 싶다가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이 쌓였다는 생각과 반기 보고서도 써야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늘은 아닌가 싶다. 그럼 이번 주에는 퇴사한다고 말해야지. 아니, 다음 주에는 퇴사한다고 말하리라.


나 할 수 있겠지, 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