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속이느라 분주했던 날
드디어 고대하던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올해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몇 달을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퇴사하겠다고 말했지만 여러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한 나는 결국 퇴사를 앞둔 2주 전, 회사에서 제안한 병가와 보직 변경을 받아드리고 퇴사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 결정에는 동생과 친구의 말도 한 몫했지만 나 역시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기 때문에 여러 상황들을 고려하여 내가 오롯이 내린 결정이었다. 병가는 원래 계획한 퇴사 일정인 12월 중순부터 3월 말까지로 대략 3개월 반이었고, 보직 변경은 제안받았던 것처럼 인하우스팀을 운영하는 것이 아닌 협력 업체를 관리하는 직무로 변경하는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내가 퇴사가 아닌 병가를 쓴다는 사실을 동료들은 '가짜 퇴사' 당일에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는 내가 실장의 지시로 동료 직원들에게 퇴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장은 내가 병가를 쓰겠다고 말한 당일,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내 퇴사 취소 및 병가 사실을 직원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즉, 내가 퇴사한다는 사실을 이미 말한 동료들에게는 그대로 퇴사하는 척을 하고, 아직 말하지 않은 동료들에게는 퇴사한다는 말 없이 그냥 병가를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실장이 내가 병가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직원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지시한 이유는 추측컨대 다음과 같았다.
1. 회사에 병가 제도가 있다는 것을 직원들이 알게 될 것을 염려해서
: 실제 일부 직원들의 퇴사 사유는 건강 악화였는데, 병가 제도가 있다는 것, 또는 있는 것은 알았지만 실제 한국 사무실에서 사용한 사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병가를 남발하여 사용할 것을 우려했던 게 아닌가 싶다. 참고로 이 병가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절차와 증빙 그리고 검사가 필요하다.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2. 건강때문에 퇴사를 결심한 직원들 중 내게만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 불공평하다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 내게만 병가를 제안한 것은 아니었다. 이직이나 학업 등과 같은 사유가 아닌 건강 문제로 퇴사한 직원들 일부에게 병가를 써볼 것을 제안한다는 사실을 한 직원 당사자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제안은 윗분들 입맛에 맞는 아주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맞았다.
3. 내 보직 변경을 보다 자연스럽게 진행하기 위해서
: 내가 퇴사가 아닌 병가를 쓰고 돌아온다고 하면 내가 진행하고 있던 중장기 프로젝트는 내가 돌아오는 시점으로 미뤄지고, 매일 진행해야 하는 업무들은 몇몇 동료들이 배분하여 '임시로' 맡아 하게 되는 모양새가 될 것이었다. 내가 퇴사를 하게 되면 현재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내 직무를 수행할 사람을 뽑지 않는 한 팀 동료들이 맡아 '기한 없이' 하게 되고, 내가 몇 개월 뒤 다시 회사로 돌아왔을 때 원래 업무가 아닌 다른 보직으로 돌아왔다고 설명하면 내 보직만 변경되는, 아주 쉽고 자연스러운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다. 윗분들한테는 소위 '일이 적은 것 같은 직원들'이 있었는데, 눈밖에 난 이 직원들에게 일을 떠맡길 기회도 되고, 내 보직 변경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니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고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4. '퇴사 - 병가 - 보직 변경'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조용히 진행하기 위해
: 1, 2번과 같은 이야기이기도 한데, 내가 퇴사할 예정이라고 말한 직원들은 내가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다시 돌아오면 '아, 퇴사해다가 다시 돌아왔구나' 내지는 '퇴사하지 않고 휴가를 쓰다가 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리 넓지 않은 사무실에서 마주쳐 얼마든지 자초지종을 물을 수 있고, 메신저나 이메일도 있어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얼마나 바보같은 방법인지 알 수 있다.) 또, 내가 퇴사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직원들은 내가 사라졌다가 몇 달만에 다시 나타나면 휴가를 길게 다녀 왔다거나, '재택 근무라 못 봤던 거구나'라고 여길 수 있었다. (이 역시 재택 근무 스케줄을 보면 내가 휴가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고, 업무상 나와 소통해야 하는 직원들은 물어 물어 내가 퇴사한 사실을 알 게 뻔했다.)
모두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 상사에게는 말해야 하지 않겠냐는 내 말에 실장은 "그럼 상사에게만 말하라"며 인심 쓰듯이 말했다. 나는 일주일 전쯤에 상사에게 이 사실을 말해 두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퇴사가 아닌 병가를 쓸 거라는 내 말에 상사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기뻐했다.
"솔직히 만다샘이 퇴사하면 만다샘이 하던 일 대부분 제가 맡을 것 같아서 걱정했거든요."
솔직함이 매력인 내 상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대책을 고안해낸 실장에게 나는 너무 화가 났다. 떠나지 말라며 어려운 일 아니라는 듯 병가를 제안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초등학생도 내지 않을 유치한 방법을 제안하면서 모든 것을 쉬쉬하라니 말이다. 소중한 동료들을 피해다니면서 거짓말을 해야 하고 내 업무를 떠맡게 될 동료들에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돌아오면 앞에서 저지른 모든 일들 역시 내가 감당하고 수습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정말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퇴사하지 않고 병가를 쓰겠다고 말하니 잘한 결정이라며 룰루랄라 신나는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간 실장은 이후 일언반구없이 깜깜 무소식이었다. 병가가 어떤 절차로 진행되는지, 적어도 어떻게 하면 절차를 알 수 있는지 가이드라인을 줘야 할텐데 퇴사를 안하기로 했다는 결정에 '이제 무를 수는 없겠지'라는 마음이 든 건지 나를 잡아 놓은 물고기인 것 마냥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시간만 흐르고 결국 답답한 마음이 들어 어떤 절차로 진행되는지, 내가 해야할 것은 무엇인지 물으니, 자신도 병가 제도는 잘 모르므로 HR 또는 본부에 물으라는 원론적이면서 허무맹랑한 답변만 듣게 되었다.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 나 똥 제대로 밟았구나.'
복잡한 이야기지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우리 회사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데, 병가 제도를 비롯한 여러 인사 제도 관련 모든 규정들이 모두 영어로 쓰여 있다. 영어로 쓰여 있다는 것이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내용이 쉽고 명확하기 기재되어 있다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요즘 번역기가 아주 똑똑하니 말이다.) 문제는 영어로 쓰여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각 규정에 적용되는 직원들의 계약 종류가 다양해서 어떤 제도가 내게는 적용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이 거대하고 까다로운 규정을 일일이 검토해 내게 적용되는지 확인하고, 그 규정에서 요구하는 절차를 따라 병가를 진행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관련 소통은 우리 사무실 HR 부서와 하거나, HR에서 본부에 직접 문의하라고 하면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본부와 이메일을 통해 진행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가짜 퇴사일까지는 일주일 남은 시점, 당장 병가를 사용하기에는 아무 것도 준비된 게 없었던 나는 일단 보름 정도 남은 연말까지 휴가를 쓰고, 그 기간 동안 병가 사용을 위한 절차를 알아보기로 했다.
아무튼 퇴사는 안 하겠다고 해버렸고 이제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패배의식을 느끼며 실장이 시키는 대로 하기 시작했다. 특히 내 퇴사일로 알려진 즉, '가짜 퇴사일'은 007 첩보물을 방불케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야 하니 나는 내 퇴사 소식을 알고 있든 알고 있지 않든 모든 직원들을 피해다니느라 바빴다. 내가 퇴사하는 줄로만 알고 있던 동료들은 내 자리로 와 "오늘이 마지막이죠? 아쉬워서 어떡해요." "푹 쉬고 몸조리 잘하고, 건강 괜찮아지면 얼굴 봐요."라며 걱정어린 작별 인사를 해주었고, 퇴사하는 줄 몰랐던 동료들은 묘하게 소란스런 내 자리를 유심히 바라보다 뒤늦게 퇴사 소식을 접했다며 같이 식사도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 마음의 끝에선 '도대체 내가 왜!'라며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사자후를 내뿜기를 반복했다.
우리 팀에서는 누군가 퇴사를 하면 퇴사하는 날 다같이 식사를 하곤 했는데, 실장은 내게 적당히 핑계를 둘러대고 식사 자리를 나가지 말라고 했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계속 해야하는 상황이 닥치면 곤란하기도 하거니와 압박감과 죄책감을 못 이겨 내가 진실을 말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며칠 전 개인 사정이 있어 식사는 같이 못할 것 같다고 동료들에게 말해 두었는데 가짜 퇴사 당일,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식사도 함께 하지 하고 떠나는지 동료들은 궁금해 하기도, 조금은 서운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4년 반 동안 함께 했던 동료 아닌가. 실제로 떠나는 것은 아니고 몇 달 뒤면 다시 만날 사이라는 걸 알기에 슬픈 마음이 든 것은 아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내가 답답하고 또 미안했다. 퇴사 선물을 주려고 했는데 내가 워낙 바쁘게 돌아다니고 퇴근 시간 되어서는 자리에서 보이지 않아 선물을 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서야 들었다.
내 병가가 '기밀'이라는 것을 아는 상사는 곤란한 나를 돕기 위해 조금 일찍 퇴근하라고 배려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가방을 패딩 속에 숨겨 꼭 껴앉고는 동료들 몰래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이 미친 놈의 회사'
아주 욕이 절로 나왔다. 앞으로 병가를 쓰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느라 어쩌면 3개월 내내 고군분투할 내 모습이 눈 앞에 그려졌다.
그래도 당장은 해방이다. 뭐가 어찌 됐든 앞으로 일어날 일은 미래의 내게 맡기고 지금은 짧은 해방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가짜 퇴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