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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솔 Oct 15. 2023

차가운, 쓸쓸함, 고독, 그리고 '김렛'

칵테일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

김렛이랍시고 라임주스나 레몬주스에 진을 타고

설탕이랑 비터스를 잔뜩 뿌려 내놓는단 말이야.

진짜 김렛은 진에 로즈사 라임주스를 반반씩 타고

아무것도 섞지 말아야지

그렇게 만들면 마티니 따위는 상대도 안 되거든.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만화 원피스의 초반에 보면 '괴혈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로의 업계 후배쯤 되는 선원 한 명이 치아가 빠지고 피를 토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쓰러진 상황에서 루피의 일행과 만난다. 이를 보고 나미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루피와 우솝에게 주방에 있는 라임을 즙으로 짜서 가져오게 하여 환자에게 마시게 하는 빠른 판단을 내린다. 


나미는 이것이 '괴혈병'임을 알고 있었고, 식물성 영양(비타민c) 부족이 원인임을 동료들에게 알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로써 루피 일행은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식량 관리와 영양 섭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요리사 포지션인 '상디'를 찾아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괴혈병은 장거리 해로가 개척된 15세기에서 19세기 사이 400여 년간 뱃사람들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19세기 초반쯤에서나 되어야 오렌지나 레몬 등 산미가 있는 과일을 먹으면 괜찮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선내에는 대신 값싼 라임을 보급하게 된다.



생으로 라임을 먹기에는 시고 떫고 향이 너무 강해서 설탕이나 술을 섞어 마셨고, 결국에는 맛과 보존력을 높인 라임주스를 시판하여 보급하게 되고, 이때 선내에 보급되던 '진'과 만나게 되어 현재의 '김렛'이라는 칵테일의 초기 형태가 만들어지게 된다.




단순함에서 오는 매력


김렛의 재료는 진과 라임주스 그리고 설탕 또는 시럽이다. 참 단순한 이 조합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잘 만들어진 김렛은 차가운 온도와 절제된 단맛, 진의 알코올도수와 향이 찌르듯이 올라오는 날카로움, 정신이 번쩍 드는 라임의 상쾌함이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차가움, 날카로움, 샤프한(?), 드라이, 등이 김렛의 이미지를 나타내기에 좋은 단어들이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따듯함, 풍요로움, 달콤한,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기나긴 이별>에서는 주인공이 죽은 인물을 추억하고 회상하거나 할 때 '김렛'을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냉정하고 비정한 하드보일드 소설 속의 고독하고 쓸쓸한 주인공의 분위기가 칵테일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묘사된다.


챈들러 소설에 나오는 김렛은 영국 로즈사의 라임주스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로즈사의 라임주스가 한국에는 수입되지 않기 때문에 국내 바에서는 신선한 생라임을 착즙 한 주스에 심플시럽을 사용한 레시피를 주로 사용한다.


이 레시피는 일본 바텐딩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클래식 칵테일 중 상당수는 도수가 높고 당도가 적은 레시피가 많다. 김렛 또한 로즈사의 라임주스를 사용한 것은 일본인이 마시기에는 너무 달았기 때문에 생라임과 약간의 설탕이나 시럽만을 사용해서 레시피를 현지화한다. 이렇게 만드는 편이 김렛을 의미하는 목공용 송곳의 날카로운 이미지와도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김렛을 바에서 즐기는 법


우리는 가끔 차도남, 차도녀이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뭔가 고독을 씹고 싶은 날 무채색의 어두운 옷을 입고 바에 간다.

모자를 눌러써도 좋다. 다만 주문할 때는 벗던지 살짝 챙을 들어서 눈을 보고 주문한다.

메뉴판 볼 필요도 없다. 김렛은 첫 잔으로도 괜찮다. 메뉴판을 펼치지 않고 바로 주문한다.

말을 아끼면서 주문한다. 사족은 금물이다.


"김렛.. 주세요."

"김렛 부탁드립니다"


딱 이 정도면 충분하다.


*바텐더가 별말 없이 주문을 받고 만들어 주면 참 좋겠지만 솔직히 이렇게 주문을 하면 너무 수상하게 보인다. 90%의 확률로 되묻는 경우가 생긴다. 이때도 최대한 무례하지 않는 선에서 간결하게 대답한다.



"드셔보신 적 있으신가요?" -> "네.. 좋아합니다."


"진은(베이스는) 뭘로 해드릴까요?" -> "투박한 걸로.."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나요?" -> "딱히 없습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 "드라이하게 부탁합니다."


"핸드릭스진으로 괜찮으시죠?" -> "핸드릭스는 싫은데요."



질문에 따라 이 정도로 답해주면 된다. 포인트는 무례하지 않게 간결하게.



주문한 김렛이 나오면 절대로 사진 찍지 않는다. 


곧바로 잔을 들고 향 한번 스윽 맡아준 뒤 크게 한 모금 마신다. 1/3에서 절반정도까지.


이제 핸드폰이나 만지거나 매장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거나 백장의 술병들을 멍하니 보거나 바텐더들 움직이는 거 구경하면서 고독하게 혼자 즐기고 있다 보면 분명히 바텐더가 다시 온다. 진정한 바텐더는 혼자 와서 김렛 주문하는 손님 못 참기 때문이다.


입맛에 맞는지 물어보거나 불편한 게 없는지 물어보는 순간, 여기서 당신의 놀이는 끝이 난다. 이때부턴 그냥 편하게 흘러가는 대로 즐기면 된다. 너무 오래 컨셉 유지하면 서로 피곤하다. 딱 여기까지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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