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 뭐해’ 싶은 순간이 꽤 많다. 눈그늘이 광대까지 번지도록 글을 써 올렸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은 날. 그런데도 다음 편을 써야 할 때. 십 원짜리 인세 계약을 맺은 어느 허기진 저녁과 처지를 들키고서 비웃음을 들은 어느 새벽에 특히 그랬다.
돌아보면 성과보다 ‘기타 의미’에 무게를 두고 하루하루 버틴 날이 많았다. 그 하루는 이틀이 되었고 이틀은 일주일로 이어졌다. 그렇게 수년을 살았다. 어쩌면 지금도 나는 ‘해서 뭐해’ 싶은 순간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두 손을 놓고 등을 돌린 채 살지는 않는다. 나는 여전히 내게 소중한 것들을 위해 애쓴다.
유병록 시인이 쓴 산문집 『안간힘』을 보면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하루 반나절 동안 무려 세 끼를 챙겨 먹었다. (…) 그러나 주변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한 끼도 먹지 않고 식음을 전폐했다면 어땠을까. (…) 그 거대한 슬픔을 내보일 힘을 끝내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문장이 나온다.
시인은 아들을 떠나보낸 비통한 상황에서 누나가 가져온 죽을 먹고, 끊었던 담배를 피우고, 장례식 한구석에서 쪽잠을 자고, 일어나 컵라면을 먹고, 아들을 산에 두고 돌아오다가 휴게소에 들려 우동을 먹었다고 했다. 어느 하나 원하던 일이 아니었으나 "치욕스럽다는 이유로 더 소중한 것을 잃을까 봐, 소중한 것을 더 잃을까 봐" 안간힘을 썼다고 했다.
숨 쉬는 일이 벌처럼 느껴지는 순간조차 시간은 흐른다. 슬픔에 빠진 순간에도 허기가 찾아오고 졸음이 몰려온다. 슬픔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들을 해내야 온전히 슬퍼할 힘을 낼 수 있다. 인간이 마주하는 큰일에는, 이렇듯 자잘하고 구차하며 성가신 것들이 뒤섞여 있고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다. 그것이 보통의 생애다.
그래서 슬픔이 찾아온 날에도 나는 뭐라도 한다. 미뤄둔 청소를 하고 쌓아둔 설거지를 한다. 지난가을에 깨진 선반 유리를 이제야 갈아 끼우고 옷장을 정리하며 조금 이른 봄 준비에 들어간다. 끝내지 못할 것 같아서 치워둔 원고를 꺼내 고치다 세탁기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나면 고개를 돌린다. 빨래를 개다가 구멍 난 양말을 발견하고 쓰레기통에 담는다.
그렇게 자잘하고 구차하며 성가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날이 저문다. 그 시간쯤이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대견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소중한 것을 잃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나도 참 애썼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의 오늘이 어땠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당신의 오늘이 나의 오늘과 다르지 않다면 오늘을 견뎌낸 당신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또 하루 애썼고,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과 그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테니까.
오늘 밤 보통의 생애를 지나는 당신에게 박수를 건넨다. 나의 박수가 ‘해서 뭐해’ 싶은 일일지라도. 당신의 등 뒤로. 토닥토닥 소리 내어. 소중한 당신을 위해 안간힘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