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공포증

첫 쓰기의 막막함

by 이학민

이상한 마술상자에 갇힌 기분이다. 벽과 천장과 바닥이 점점 좁아진다. 숨이 막힌다. 상자는 물 위에 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는 이 거대한 울렁거림이 설명이 안 된다. 가슴이 심하게 뛰고 땀이 나서 극장을 빠져나가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잠시 후 영화가 시작될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블 영화가.


저마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한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고, 마음이 지칠 때 위안이 되는 한 가지. 내게는 마블 영화 시리즈(Marvel Cinematic Universe)가 그렇다. 영화를 통해 가상의 세계로 떠나는 순간마다 고된 현실을 잊었고, 영화가 끝나면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힘으로 살기도 하였다. 가장 선호하는 여행지 같은 이곳이 지금은 연옥처럼 느껴진다.


두 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 동안 내 정신은 두 갈래 나뉘었다. 하나는 온통 영화에 몰입하느라 바빴고, 또 하나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미련하게 두 시간을 견뎠다. 영화가 끝나고 약속을 취소했다. 어떻게 귀가했는지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며칠 후 두 번째 관람을 하러 갔다. 마블 영화를 보는 순간을 두려운 기억으로 놔둘 수 없었다. 첫 상영 때는 기대가 너무 컸고 몸이 좋지 않아 그런 거라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비슷했다. 딱 한 가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점만 빼고는.


극장 불이 꺼지자 답답함과 울렁증이 밀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의 맨 뒤편으로 달아났다. 함께 간 친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잠시 선 채 숨을 쉬어 본다. 내가 왜 이러지. 조금 울적해졌다. 이제 다시는 극장에 올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이대로 돌아가면 정말 그렇게 굳어질 것 같아서. 뒤편의 빈자리에 가 앉았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블 영화는 해마다 두세 편의 영화가 개봉한다. 이제 극장에 갈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VOD로 출시되기 전까지 나는 마블 신작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살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에서 살아갈 힘을 얻을 때가 있다. 세상이 제멋대로 흐르고 내가 내 마음에 들지 않던 시절, 나는 마블 영화를 처음 만났다. 그로부터 시간의 흐름이 지겹거나 두렵지 않았다. 무언가 고민에 빠져있다가도 마블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고민을 잠시 잊을 때도 많았다. 이제는 개봉 소식을 듣고 고민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게는 극장 공포증이 생겼다.


7.png Ⓒ 이학민


좋아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이 일치할 때 우리 일상은 복잡해진다. 쓰는 사람에게는 낯설지 않은 일이기는 하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비슷한 질병이 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백지 공포증.


글쓰기는 이전의 경험이 다음 시작을 쉽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십여 년간 글쓰기를 생활로 두고 살아왔지만, 여전히 시작은 두렵다. 더해, 내 마음이나 생각, 지식이나 정보를 한정된 지면 안에 온전히 담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휩싸일 때가 많다.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글을 쓰려고 하면 너무 많은 생각들이 떠올라 나는 공포에 질리곤 한다*던 기형도 시인의 고백처럼 주제나 소재를 던져 주면 곧잘 쓸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는 백지를 마주할 때 쓰는 사람은 쉽게 공포에 빠진다.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에서 참조



백지가 주는 공포가 극에 달하면 나는 타이핑을 한다. 손에 잡히는 책을 아무거나 펴고 문장과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필사를 할 땐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집중하며 속도를 늦추는데 이때는 내가 뭘 쓰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할 만큼 후두둑 써버린다. 노래를 틀어 놓고 가사를 옮겨 적을 때도 있고, 창문을 열어 두고 밖에서 들리는 아무 소리를 따라 적기도 한다. 한 시간쯤 손가락을 움직이면 책 내용과 관계없는 생각이 도롱도롱 떠오른다. 그것을 반복하면 어느 순간 글이 쓰고 싶어지고 그렇게 어물쩍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백지 앞의 공포에는 극복이 없다. 첫 순간의 막막함을 어떻게든 견뎌내는 것이 유일한 처방이다. 그렇다면 극장 공포증도 백지 공포증처럼 견디기로 해결할 수 있을까.


이듬해 다시 극장에 갔다. 빈손으로 가지는 않았다. 우선 좌석은 맨 뒤 통로 옆자리로 잡았다. 언제든 달아날 수 있도록. 상영 시간도 늘 보던 첫 시간대가 아닌, 정신이 또렷해지는 점심쯤으로 잡았다. 마음을 안정시켜준다는 초콜릿을 준비하고, 잠도 충분히 자두었다. 무엇보다 며칠간 같은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 순간 내게 찾아올 공포를 예습한 것이다. 그리고 암전.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린다. 후—읍, 후—읍, 심호흡을 해본다. 명치와 배꼽 사이로 파도가 지나가고 나는 뱃멀미 하듯 헛구역질을 한다.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한다. 몸에 힘을 뺀 채 ‘괜찮다’ ‘편하다’ 같은 말을 주문처럼 되뇐다. 영화가 시작되고, 다시 후—읍, 후—읍. 그러기를 몇 번. 내 몸은 드디어 괜찮은 상태로 돌아왔다. 아직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시작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 하나는 얻었다.


해가 넘어가는 순간이나 변화가 필요할 때마다 우리는 저마다 새로운 다짐을 한다. 주로 공부나 금연, 금주나 운동처럼 나를 더 이롭게 할 계획을 세우고 도전에 나선다. 처음 며칠은 성실하게 계획을 이행하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의욕이 떨어지게 되는데,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를 경험할 때가 많다.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시작을 반복하는 일. 돌아보면 수많은 시작이 쌓여 있는 일. 그 시작을 들여다 보며 다시 도전에 나서는 일. 그 일은 우리의 일상과 많은 부분 닮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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