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들

글감 찾기

by 이학민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참치회, 갈비, 초밥 같은 음식을 그릇에 옮겨 담는다. 이곳은 내가 아르바이트 중인 웨딩홀 뷔페. 오늘 행사는 한 어르신의 고희연이다. 식사 중인 사람들에게 다가가 빈 그릇을 치우고, 빈 잔에 물을 따라 주는 것이 지금 나의 일이다. 연회를 준비하는 일. 즉, 테이블을 옮기고, 그 위에 새하얀 식탁보를 깔고, 의자를 배치하는 이전 업무보다는 쉽지만, 고객의 행동을 주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눈과 발이 피곤한 업무다.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하지.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중앙 테이블에 앉은 한 남자가 자꾸 눈에 띈다. 회색 중절모를 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음식이나 술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릇을 치우거나 물을 따르는 일도 나 대신 그들이 해주었다. 잠시 후 중절모 남자는 일흔의 어머니 옆에서 기분 좋게 취해가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들은 지방의 조직폭력배라고. 가만. 나는 그 정보를 누구에게 들었더라.


이처럼 기억은 기억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뷔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취미로 글을 쓰던 스무 살 무렵, 나는 글을 쓰려고 하면 어제 일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안 쓰면 되니까! 다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부터는 입장이 달라졌다. 쓰는 사람에게는 쓸 게 없는 상태에서도 써야 하는 순간이 있다. 자신과의 약속이든, 독자나 업체와의 계약이든 마감이 정해지면 반드시 써내는 것이 대중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의 의무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처음 몇 해는 가깝고도 생생한 기억으로 의무를 다했다. 다만 그러한 기억은 오래가지 않았다. 글감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글감은 중절모 남자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던 부하들처럼 가만히 앉은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갑자기 영감이 떠오르는 일도 거의 없다. 따라서 평소에 글감을 찾고, 모아야 한다.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이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헤맨다면 글이 될 만한 사연과 사람과 장면을 놓쳤다는 의미다. 하루하루는 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일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다른 점을 발견하고 남겨두어야 한다. 인상적인 장면을 보면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휴대전화 메모장을 연다. 뭐든 떠오르거나 기록해야겠다 싶으면 일단 메모장에 써둔다. 그리고 그것은 글의 제목, 주제, 소재, 문장 등 다양한 원료로 사용된다. 기록의 힘이다.


지난해 산문 구독 서비스를 했다. 연재 전 유료 구독자를 모집하고, 한 달에 스무 번, 메일로 산문을 보내는 구독 서비스였다. 초단편 소설, 연작 소설, 기획 산문은 물론 큐레이션을 담은 원고나 사회적 칼럼까지 다양한 형식의 글을 다루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주말을 제외하고는 전부 발행일이어서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지치는 일정 속에서 마감은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이 또한 기록의 힘이다.


글감은 주로 일상에 있지만, 작품 속에 있는 경우도 있다. 글감을 기록하기 위해 나는 영감을 주는 작품도 미리 만나둔다. 책, 영화, 드라마, 음악 등 다양한 형식의 콘텐츠를 기웃거린다. 길을 걷다 우연히 들은 음악이나 어쩌다 보게 된 영화에서도 글감은 나올 수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우연의 일이다. 우연만으로 일을 할 수 없으니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작품을 찾아두려고 늘 안테나를 세워 둔다. 그렇게 만난 단골 작품이 몇 있다. 글감을 주는 작품 중 으뜸은 의외로 사람이다. 사람은 관점마다 다른 감정을 준다. 감정은 문장이 된다. 내가 꼭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무언가 쓰고 싶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이 글 역시 그렇게 시작되었다.


며칠 전 지인과 대화를 나누는데 ‘일상처럼 매일 글을 쓰는데 어떻게 글감이 떨어지지 않을 수 있나요?’ 내게 물었다. 지금 이 원고가 대답이 되리라 믿는다. 비록 나의 지인이 ‘내가 꼭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대화를 나누나 보면 무언가 쓰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문장을 보고 오해를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면 이 글이 또 다른 대화(혹은 해명)의 시작이 될 것이고, 대화를 통해 나는 또 글감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여행도 글감을 모으는 데에 도움이 된다. 낯선 공간이 뇌에 자극을 줄 때 우리는 새로운 관점이나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지는 글의 배경도 될 수 있다. 이렇다 할 글감을 구해오지 못해도 괜찮다. 여행이 좋은 글감을 주듯 글감 찾기는 여행의 명분이 되어주니 어느 쪽이든 행복하면 그만이다. 언젠가 ‘여행이란, 여기서 행복할 것’이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이를 내 식대로 바꾸자면 ‘여행이란, 여유가 행복’으로 말할 수 있겠다. 저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르다. 나는 안온한 자유로움 안에 속할 때 행복을 느낀다. 그곳이 어디든 여유를 느낄 수 있다면 행복하다는 의미다. 내게 여행의 목적이 장소가 아닌 순간에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 참조.


22.png Ⓒ 이학민


세상이 갈수록 빨라지고, 우리가 점점 바빠지기만 한다면. 그래서 한 줌의 여유도 손에 쥐지 못한 하루가 반복된다면 그 사회는 불행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있다는 증조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진짜 필요한 것은 여유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행복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행복하려면 내가 즐겁고 충만한 순간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반복하면 된다. 다만 그럴 시간과 상황을 만드는 게 어렵다. 당장 여행을 떠나기 어려울 때 우리는 손을 먼저 떠나보낼 수 있다. 글을 쓰는 것이다. 돌아가지 못할 어느 한때를 방황하고, 누군가와 함께 누리고픈 풍경을 손으로 쓰면 된다. 그 순간 우리의 눈빛은 여행자의 눈빛처럼 바쁘게 빛날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 메모를 하고, 영감을 주는 작품을 만나고, 여행을 가는 수고가 끝나면 드디어 글을 쓸 차례. 다만 애써 모은 글감에 손이 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것이 글이 되겠다 싶어 적어두었는데 막상 열어 보니 글의 구조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기록과 흔적이 무용하게 느껴지는 그런 순간에는 비장의 글감을 꺼내 들 필요가 있다. 이미 와 있기에 입국 심사가 필요 없는 글감. 누구에게나 있다. 생각만으로도 좋은 것들. 살다 보면 만날 수 있고, 만나면 살 수 있는 것들.


좋아하는 것들
봄볕
새벽 산책
희고 찬 눈과
그것을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
가을, 가을 아침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영화
어느 시인의 산문집
내 멋대로 글쓰기
가까운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
참 쉽게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들
기다리면 반드시
만날 수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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