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반성

글쓰기의 이로움

by 이학민
기계가 고장이 난 게 내 실수는 아니잖아


언젠가 기계 대신 혼이 난 사람의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나와 현과 정이 모인 자리였다. 언제나 그랬듯 최근의 불행담을 경쾌하게 주고받은 우리는 별안간 실수담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현이 먼저였다. 스무 살 무렵 옷가게에서 일을 할 때였는데 한 고객이 며칠 전에 사간 옷을 들고 와 환불을 요청했다. 점장은 자리를 비웠고, 카드를 취소하려는데 기계는 말을 듣지 않았고, 고객도 점원의 사정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어서 취소해달라며 성화 댔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너무 당황해서 현금으로 환불해 주었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

“점장한테 엄청 깨졌지.”


내가 점장이 너무 했다고 말하자, 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래서 알바를 잘 뽑아야 해.” 당시 정은 카페에서 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번엔 내 차례. “가장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아무래도 내가 한 것 같네”. 나는 팔짱을 낀 채 운을 띄었다. “작업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현금으로 만 원이 필요하시다는 거야”.


나는 카드를 들고 밤거리로 나갔다. 농협 인출기는 아직 불이 커져 있었다. 카드를 꼽고 만 원을 인출했다.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출금을 했는데 기계에서 돈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내가 이렇게 부주의한 사람이었나. 아니, 그전에 사람이 맞긴 한가 싶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농협에 갔지만 돈은 없었다.


“동전이면 모르겠는데 만 원이잖아.”

“만원은 큰돈이지.”

“그렇다고 도난 신고를 하기에는 정황을 설명할 자신이 없는 거야. 심지어 모두 퇴근한 시간이었고. 수치와 만 원을 바꾸고 싶지 않아서 새로 뽑아갔어.”

“잘했네. 겨우 만 원인데.”


맥락에 따라 가치가 수시로 변하는 만 원처럼 실수 앞의 내 마음도 시간마다 달라졌다. 농협 인출기 사건은 발생 당시에는 자괴감이 컸다. 내가 너무 한심하고, 조그맣고, 멍청하게 느껴진 것이다. 지금은 그저 멍청한 실수를 한 번 했다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사소한 실수를 할 때마다 남 눈치가 아니라 내 눈치를 볼 때가 많았다. 타인의 비난보다 스스로 실망하는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부터 실수를 바라보는 나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졌다. 글쓰기는 이해를 시도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다만 시간이 흘러도 이불을 걷어차게 만드는 실수가 있다. 그런 실수가 떠오를 때마다 나는 이불 타작 대신 타인의 실수를 복기한다. 그러고서 결론을 내린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아니, 사람은 실수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이러한 사실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작은 위안이 된다.


15.png Ⓒ 이학민


실수가 아닌 잘못 또한 내가 글을 쓰며 다시 바라보게 된 주제다. 어릴 때는 내가 저지른 잘못은 다 잊고 싶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처럼 실연의 현실과 기억의 상실이라는 선택지가 내 손에 쥐어진다면 나는 기억의 상실을 택했을 것이다. 대상이 무엇이든 고통보다는 잊는 편이 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바람일 뿐. 글을 쓰고부터는 지나온 일을 스스로 꾸짖는 일이 취미가 되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나의 무례함과 명백한 잘못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가까운 사람에게 말로 상처를 주거나, 함께 세운 규칙이나 약속을 어긴 것이 여러 번이고, 책임져야 할 일 앞에서 도망친 기억도 있다. 당시 흔한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뒤늦은 반성의 시간은 괴롭기만 하다. 다만 그 시간을 마주하지 않고서 쓸 수 있는 글은 거의 없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나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쓰기 전에는 몰랐다. 내 안의 가장 어두운 밑을 들여다보는 일.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그림자를 만지며 괴로워하는 일. 그러다 그 괴로움을 배고 단잠에 빠지는 일. 잠에서 깨어나 되지 않을 용서를 혼자서 구하는 일. 그 과정이 쓰는 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을.


글쓰기가 실수를 이해하는 과정이고, 잘못을 반성하게 만든다면, 그것을 반복하는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나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매일 글을 썼지만,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보다 사람을 적게 만나다 보니 실수나 잘못을 드러낼 기회가 줄었을 뿐. 나는 앞으로도 못나거나 못된 행동을 할 것이다. 물론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간절하다. 마음만으로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딱 이 만큼이 내가 글을 쓰며 배운 이해와 반성이다.


사람은 다 조금씩 이상하고 그보다 나쁘며 어느 순간 선해지는 존재다. 이 복잡한 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적당히 더럽고 적당히 어둡다. 완벽하고 무결한 사람은 없다. 다만 완벽하고 무결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할 뿐. 시선은 기대에서 나오고, 그 기대가 실망을 만든다.


한 번 실망했다고 해서, 그 대상이 자신이든 타인이든 등 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적당히 떨어져서 지켜보면 실수와 잘못을 만회하며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람은 큰 기대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럴만한 크기를 가진 사람을 나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다만 사람에 대한 작은 기대는 버리지 않는다. 나를 만나면 반가워하겠지. 나와 대화할 때는 재밌어하겠지. 나를 위로해줄 때는 내가 아프거나 슬프지 않기를 바라겠지. 그것은 큰일이지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내가 잃어버린 만 원은 누군가의 작은 기쁨이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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