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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Jun 16. 2023

국경을 넘는 여행자처럼

에세이 앤솔로지 《여행의 장면》

책에 기대 살다 보니 여행도 독서로 대신할 때가 많다. 책 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어딜 가겠느냐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기도 한다. 아무리 읽은들, 의식의 여행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여전히 그것이 무용하거나 미진한 행위라고 여기지 않아서 독서를 우선하지만, 안다. 떠나야만 알 수 있는 세계가 있음을. 다만 발목을 붙잡는 여러 사정들. 요컨대 시간이 없거나 시간이 없거나 시간이 없어서, 다시 책을 찾는다. 어떤 책인가. 때마다 다르나 이번 선택 이유는 이름이었다. 한 권의 책에서 확신의 저자 목록을 발견했다. 여름이었다.

     

《여행의 장면》(유유히, 2023)은 열 명의 공저자가 여행을 주제로 함께 쓴 에세이 앤솔러지이다. 저자 면면이 화려하다. 온라인 서점에 적힌 소개를 보자. “2030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10인의 작가.” 에세이 독자라면 이 문장에 조금의 과장도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10인의 작가와 계약한 기획자. 그리고 책을 만난 독자가 똑같은 표정으로 경탄했을 거라 짐작해도 지나친 상상은 아니리라. 아무려나 나는 믿는다. 좋은 작품을 만들려는 기획자의 욕심이 최대로 실현될 때, 비로소 독자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물론 좋은 재료가 좋은 결과물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실현은 결과물이 판가름한다. 그러니까 책이, 좋아야 한다. 확인 방법은 하나. 읽어봐야만 안다. 의심은 첫 꼭지를 읽고서 남김없이 사라졌다. “김밥 쌌어. 비행기에서 먹으라고.”(41쪽) 수신지 작가가 쓰고 그린 〈비행기를 타기 전에〉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한 가지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 책을 좋아하게 될 거라는 예감. 순수하고 곡진한 마음 앞에서 늘 그렇듯 무장 해제되어 버린 것이다. 이어진 아홉 개의 장면(글)은 어땠을까. 조금씩 함께 들여다보자.

     

이다혜 작가의 글 〈사라진 감각과 선호에 대하여〉에는 이러한 문장이 나온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 반짝이는 여행의 순간들.”(218쪽) 각자가 그린 여행의 장면들도 그랬다. ‘나만 아는 유일한 순간’을 저마다 고유한 문장으로 구현했는데, 내게는 그 장면들이 낯설고도 익숙했다. 이연 작가의 〈태양계 여행〉은 전자에 가까웠다. (혼자서는)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는 여행 에세이라니. 그는 용기 내 인정한다. “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고, 사랑과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58~59쪽). 어쩐지 벅차오르는 고백이다.

     

평소 ‘의식주콘’(의식주에 콘텐츠를 더한, 인간 생활의 사대 요소)을 주장하는 서해인 작가의 글은, 그의 참신한 통찰만큼이나 새로웠다. 〈구글 지도와 어떤 돌봄노동〉에 관한 설명인데, 스포일러 없이 소개한다면 이것만 말하리라. “둘만의 일이 아니라 나까지 세 사람의 일이었다.”(179쪽) 일본으로 떠난 임진아 작가는 〈혹시, 한국 분이세요?〉를 통해 ‘다른 의견’을 말한다. 서로 다른 생각과 태도 그 낯섦 앞에서. 다만 다정하고 편견 없는 시선으로. 누구도 납작해지지 않도록. “한국어 볼륨 줄이지 말고 속마음을 크게 말해주라.”(97쪽)


이번엔 익숙한 장면을 함께 보자. 고수리 작가의 〈돌아보면 반딧불이 같은 추억일 거야〉는 가족과 함께 떠난 캠핑의 장면을 그린 글인데, 마음 쓰던 그 밤을 저자는 이렇게 기억한다. “가만히 돌아볼수록 작지만 따뜻하게 빛나는 추억.”(157쪽) 우리가 여행이라는 단어 앞에서 행복과 그리움을 느낀다면 이러한 추억 때문이리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난 봉현 작가의 사정에도 공감이 갔다. 그는 “검증된 리뷰도, 계산된 일정도 필요 없는 여행. 그래서 완벽했던 여행”(205쪽)을 추억한다. 홀로 떠난 여행지는 쿠바였다.

 

유명해지고 싶은 동시에 사라지고 싶은 양가감정. 대중을 상대로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그 마음 앞에서 봉현 작가는 해방을 선택한다. 인터넷조차 연결하기 힘든 쿠바로 떠난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고, 자신도 아는 이 없는 곳에서 그는 자신을 만났다. 그래, 이따금 여행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 “살아있다! / 내가 지금, 바로, 여기 있다!”(208쪽) 마음으로 외칠 수 있는 곳으로의 이탈. 그런데 이상하다. 쿠바를 다녀온 건 내가 아닌데, 책을 덮자 여독이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 피로의 출처는 어디인가.


아마도 다른 꼭지로 넘어갈 때마다 누적된 피로인 듯하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의 가장 큰 공통점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점이다. 책의 공저자들도 그렇다. 많은 이가 신뢰하는 이름이라는 것 외에는 같지 않다. 각자의 문체와 정서가 고유하다. 그렇다 보니 다른 저자의 글로 이동할 때마다 내게는 적응할 시간과 기운이 얼마간 필요했다. 마치 국경을 넘는 여행자처럼. 저자마다 문체와 정서가 다른 것쯤 놀랄 일이 아니다. 고유함이 유지된 채 한 권에 담긴 것은 놀랍다. 이 책은 진짜 여행 앤솔러지였다. 여행지가 바뀌는 감각을 구현한.


이쯤에서 한 꼭지를 선정하려고 한다. 나의 여행 습관과 비슷하거나 로망으로 둔 여행지를 그린 꼭지를. 그런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엄살이 아니다. 읽고 선택해 보면 이 어려움에 공감하시리라. 모든 글 안에, 살아가며 한 번쯤 경험해 본 감정이 담겨 있고, 비슷한 여행관 또는 닮고 싶은 가치관이 놓여 있으므로. 곰곰 고민 끝에 내린 결정. ‘오늘의 여행지’를 선정하겠다. 어제였다면 봉현 작가의 글을, 책을 처음 펼친 순간이라면 이다혜 작가의 글을 꼽았을 것이다. 오늘은 김신지 작가의 글이다. 제목은 〈잠시 다른 인생을 사는 기분〉.


“낯선 도시에 아는 나무가 있다는 게 좋았다.”* 말하던 저자는 이번엔 이렇게 썼다. “나는 이곳을 오래도록 그리워하겠구나. 지구 한편에 ‘아는 마을’이 있어 오래 따뜻하겠구나.”(75쪽) 아는 맛을 즐기는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여행지, 태국의 치앙마이로 떠난다. 그곳에서의 일일은 평화로워 보인다. 글이 집이라면 이런 집에 살고 싶다고 느껴질 만큼. 나는 읽는데, 읽을 뿐인데 자꾸만 양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자꾸자꾸 기분이 달뜬다. 단정한 생활감. 유머와 너그러움. 반려인과의 믿음과 사랑. 그의 글은 타국을 배경에 두어도 낯설지 않았다.


우리가 다음으로 함께 갈 곳은 저자의 ‘아는 마을’ 빠이이다. 저자가 머문 숙소로 가보자. 저자는 이곳에 머문 한 여행자의 사진을 보고 이 숙소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런 이유로. “아, 이게 나였으면…… 때로는 그런 생각이 드는 곳에 나를 데려다놓기 위해 먼 길을 나서기도 한다.”(73~74쪽) 평소 저자는 행복의 ‘ㅎ’을 모은다고 말한다. 여행에도 ‘ㅎ’이 있다.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여행 중에서도 그는 작은 행복을 줍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런 것들. 맥주, 테라스, 우듬지, 햇볕, 종소리. 그리고 강아지와 고양이.


“살아서 갈 수 있는 천국”(77쪽) 같다는 빠이에서 그는 생각한다. “내가 이런 삶을 원했던가? 싶어지는 순간, 사는 일이 끝없는 숙제처럼 느껴지는 순간 우리에겐 고요하고 평화로운 여행지가 필요할지 모른다. 아, 눈앞의 이 삶이 전부는 아니지, 느끼게 해줄 여행지가.”(79쪽) 우리에게 평온한 여행이 필요한 이유, 그런 여행담을 읽는 이유. 여기 다 있다. 더할 말은 없다. 다만 제철 숙제가 남았다. 공저자들의 다른 책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일. 우리 안의 책 지도를 다시 그리는 일. 그것이 우리를 제철 여행자로 만들어줄 새로운 기회이리라.

 

책을 통해 알게 된 작가가 있다. 한 시인의 행적을 좇아 일본에 다녀온 시인. 〈쓸쓸한 마음, 그럼에도 밝은 쪽으로〉에 담긴 오하나 시인의 시가 여행지에게 만난 무지개처럼 반갑고 귀해서, 나는 그이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졌다. 물론 다른 저자들의 책도 찾아 읽어보려 한다. 과연, 서한나 작가가 〈카페 사이공〉에 쓴 대로 “여행보다 좋은 것은 여행 이후”(112쪽)인지도 모르겠다. 여행은 또 다른 여행을 만든다. 책 역시 다른 책을 읽게 한다. 인생의 지도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출발해야지. 국경을 넘는 여행자처럼.




*《평일도 인생이니까》(김신지, 알에이치코리아, 2020)




(2023. 06. 16.)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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