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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Mar 21. 2024

어둠 속에서 똑바로 걷기

에밀리 디킨슨의 시

박목월 시인의 미발표 시가 공개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한 가지 의문. 시인은 공개를 반길까? 물을 수 없으니 진실은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새로이 공개된 시가 곧 대중과 연구자들에게 읽힐 거라는 것. 그로 인해 시인의 시 생애가 조금 더 정밀히 파악될 거라는 사실 뿐이다. 사후의 문학적 평가를 당사자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동의할까, 부정할까? 이 역시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미발표 시의 공개가 시인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풀거나 확신을 강화하거나 인식을 재정립하는 데 영향을 줄 거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작품의 사후 공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 있다.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 그의 경우는 위 사례보다 더 극적이다. 생전에 단 일곱 편의 시를 그것도 익명으로 발표한 디킨슨은 죽음을 앞두고 자기가 남긴 기록물을 전부 불태워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동생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유작을 모아 시집을 펴냈다. 시인의 의사와 반하는 선택이기는 하나 그 덕분에 우리가 디킨슨의 시를 만나게 되었으니 독자로서는 다행한 일이리라. 당사자에게 허락받지 못했지만, 그가 쓰고 타인이 꺼내 놓은 수많은 시 가운데 한 편만 함께 읽어 보자.



빛이 사라지자 - 
우리는 어둠에 익숙해졌다 -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
이웃이 램프를 들어 주는 것처럼 -      

우리는 새로운 밤에 - 잠시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다가 - 
그 뒤 - 어둠에 익숙해져 -
꼿꼿하게 - 길을 걸어간다 -      

그리고 더 큰 - 어둠을 만난다 - 
두뇌의 저녁도 - 
달이 뜰 기미가 없고 - 
하늘에 - 별도 - 없을 때 -     

가장 용감한 사람들이 - 조금씩 더듬다가 -
가끔씩 앞이마를 
나무에 부딪히지만 - 
보는 법을 배우게 될 때 -      

어둠이 변해서인지 - 
아니면 눈이
한밤에 적응해서인지 - 
인생은 거의 똑바로 걸어간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시인이 남북전쟁 시대를 살았고, 가까운 이들을 잃었으며, 스스로 은둔 생활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시 속 ‘어둠’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나 개인사를 차치해도 시 속 암순응에 대한 나의 인식은 같다. 어떻게 읽든 고통 앞에 선 인간의 의지로 다가온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시가 시대를 돌파하는 힘을 가졌다고도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와도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상실처럼 극심한 고통의 사례가 아니어도 우리는 일상에서 “빛이 사라지”고 “어둠에 익숙해”지는 순간을 겪는다. 예외는 없을 것이다.     


어둠이 찾아와 길을 가릴 때 대개는 멈춰 선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발걸음 재촉하기 어려워서. 그 순간 일상이 흔들리고 마음은 무너진다. 나아가지 못한다. 시 속 등장인물들은 어떤가. 그들은 빛이 사라져도 누구 하나 주저앉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도, 더 큰 어둠을 만나도 나무에 앞이마를 부딪쳐도 “거의 똑바로 걸어간다.” 마치 죽음이라는 단절마저 통과해 우리에게 걸어온 디킨슨의 시처럼. 때로는 길 또는 정답이 보이지 않아도 용기 내 걸어가야 할 때가 있다. 그 순간 필요한 용기를, 용감하고 당당한 태도를 상기하고 싶을 때 나는 그의 시를 읽는다.      


‘Called Back.’ 디킨슨의 묘비명이다. 시인이 안식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로 읽으면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안식에 이른 뒤에야 그의 시가 세상에 소환된 사실을 떠올려 보면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디킨슨이 떠나고 그의 시가 공개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는 우리의 세상을 모르지만, 우리는 그의 시를 안다. 이 부당함을 긍정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독자의 특권일 것이다. 앞으로도 세상을 떠난 창작자들의 작품은 어떤 행태로든 소환 또는 발굴될 테다. 그때마다 다음 말을 실감하리라. 예술을 담기엔, 인생은 짧다.     



(2024. 03. 21.)

(@dltoqur__)



*에밀리 디킨슨은 시에 제목을 붙여두지 않아서 편집자가 임의로 붙인 숫자나 시의 첫 행을 제목으로 부른다. 위 시는 《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조애리 역, 을유문화사, 2023)에 담긴 시를 가져왔으며, 해당 책에는 창작 연도 순서로 제목을 붙인 ‘존슨 넘버’을 사용해 ‘419’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단 한 편의 시만 가져왔고, 우리는 여전히 시의 제목을 알 수 없으므로 여기서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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