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숙이는 친구를 보며

천 명의 지인 세 명의 친구

by 진저

일을 할 때는 일이 나를 결정한다. 내가 일을 정하는 것이 아니다. 일터에서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고 일이 이끄는 대로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산다.

그렇게 처절한 공간에 있을 때 자신의 원래 모습을 아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면 기분이 어떨까. 가면 너머 반쯤 가려진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지 않을까. 뒷덜미가 조금 시큰해지지 않을까.


나는 친구의 그런 모습을 목격한 일이 있다.


회사 숙직을 하고 쉬는 날 오후였다. 내 오래된 친구 홍이가 일하는 곳을 찾았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난 홍이는 대학 졸업 후 동대문 도매상가에서 낮밤이 뒤바뀐 생활을 몇 년 하다가 어느 날 서울의 한 백화점 명품 편집숍 매니저로 취직했다. 동대문에서 일할 때는 오후 6시에 출근해 다음날 아침 7시나 돼야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하느라, 백화점에서는 무조건 토일 일하고 평일에 하루 쉬는 근무패턴 때문에 우리는 오작교 견우직녀처럼 좀처럼 만나지 못했다.

그날은 마침 내가 평일 휴무를 하게 됐고, 친구도 오후 다섯 시면 다음 근무자와 교대하고 일찍 퇴근하는 날이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친구가 일하는 백화점에 한 시간 일찍 도착했다. 친구는 손님인 줄 알고 자동적으로 고개를 돌려 인사를 하다가 날 알아봤다. 그리고 최대한 입모양을 움직이지 않고 반가움을 표현했다.

“야아 아아아아-아!”


유니폼을 입은 친구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검은색 블라우스에 무릎 바로 위에서 딱 떨어지는 검은색 스커트, 검은색 스타킹. 온통 검은색이었다. 유일하게 색깔 있는 거라곤 가슴팍에 조그맣게 달린 직원 명찰이었는데, 금색이었지만 전혀 고급스럽지 않았다. 펑퍼짐한 옷만 입는 홍이의 평소 패션 취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니폼이었다.


매장 안에 아무도 없고, 매장 반경 5m 안에 이쪽으로 향하는 별다른 움직임도 없다고 판단되자 홍이는 나에게 다가와 내 등짝을 내리쳤다. 소리 안 나게. 그러고 나서 우리는 금세 서로 떨어졌다. 나는 쇼윈도 근처를 서성이며 백을 둘러보는 손님처럼, 친구는 카운터에 서서. 서로를 돌아보지 않고 조용한 수다를 이어갔다.


그러다 손님 한 명이 들어왔다. 곁눈질로 보니 홍이의 표정과 호흡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수백만 원 하는 백을 꺼낼 때에 흰 장갑부터 꼈다. 디자인이 어쩌고, 가죽이 어쩌고, 한정판이고, 나중에 가치는 더 오를 것이고…. 친구의 설명에 손님은 더욱더 도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의 까다로운 기준에 못 미친다는 듯이. 보이지 않는 밀당이 몇 분간 이어지다가 손님은 매장 밖으로 발길을 돌렸다.


손님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홍이는 다시 내 고등학교 친구로 돌아와서 조그만 소리로 "헤헷" 하고 웃었다.


이제 친구의 퇴근까지 30분 남았다.

홍이는 손님이 없을 때라도 앉아 있는 게 걸리면 백화점 관리자에게 혼이 난다며 카운터 뒤에서 팅팅 부은 종아리를 주물렀다. 굽 있는 구두에서 내려와 차가운 바닥에 발바닥을 대고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기웃거리다 지나가고, 친구는 입 꼬리를 올린 채로 서 있고, 그런 반복 끝에 마침내 한 명이 매장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손님은 산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백을 환불해 달라고 했다.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을 가리키며 “내가 여기 VIP야.”라고 덧붙이며.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나는 자리를 떠서 백화점 다른 층을 부유하듯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삼십 분이 지나서 다시 돌아갔을 때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친구는 상품에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변심으로 한 달 된 것을 환불해 줄 수 없다며 아이를 얼레고 달래듯 하고 있었다. 막무가내 손님 앞에서 말끝마다 “죄송하지만…”을 붙였다. 뭐가 죄송한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손님은 그 정도 미안해하는 것으론 성이 안 찬다는 듯 언성을 높여만 같다. 친구의 귀는 빨개졌다. 허리를 숙이고 “손님, 너무 죄송하지만 이건 규정상 환불이 안 됩니다”라고 반복했다. 결국 백화점에 항의하겠다며 사무실을 찾아 올라가겠다며 손님은 매장을 나갔다.


“참내, 별 사람이 다 있다”라는 내 말에 친구는 말없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제풀에 지쳐 갔는지, 백화점 관리자에게도 뾰족한 말을 못 들었는지 그 손님은 되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는 제시간에 맞춰 퇴근할 수 있었다. 창고의 박스와 박스 사이 공간에서 유니폼을 벗고 헐렁한 옷으로 갈아입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애써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우리의 고등학교 때가 생각났다.

홍이는 그림을 좋아해서 미술 전공으로 대학을 가고 싶어 했다. 물감이 묻은 나무 화구 가방을 들고 다녔다. 우리가 문제집과 씨름하고 있을 때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홍이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어느 날 한 번은 수업시간에 홍이의 고개가 꾸벅꾸벅 하자 선생님이 일으켜 세워서 혼을 냈다. 수업시간에 왜 자냐고. 그러자 홍이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전 잔 게 아니라 존 건데요.”

그게 뭐가 다르냐며 황당해하는 선생님에게 홍이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존 건 잘못한 게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는 키득 키득댔고, 선생님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흰 장갑을 끼고 신줏단지 모시듯 명품 백을 꺼내서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내는 친구를 보며 나는 그때가 정말 드물게 찬란한 때였구나 생각이 들었다. 눈 주위가 뜨거워졌다.


“야, 가자, 뭐 먹을까?”

“나 오래 기다렸으니까 네가 쏴라.”


가면을 쓸 줄 아는 어른이 되어버린 친구를 보면서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더 머리를 숙여야 하는 걸까 서러워졌다. 그렇게 조금 시무룩해진 내 표정을 보고, 친구가 내 등짝을 아까보다 훨씬 더 세게 내리쳤다.

“야! 빨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