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효용 가치

천 명의 지인 세 명의 친구

by 진저

서울 종각역 일대는 12시가 가까워지면 마치 하교시간 교문 앞처럼 샐러리맨 인파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몇 달 전 전 회사 선배와 (하필) 여기서 만나기로 해서 나도 이 인파에 합류했다.

40대 중후반인 K 선배는 나와 일 년 동안 같은 부서에서 함께 일한 사이다. 어느 날 회의시간이었다. 출근시간보다 (무려) 두 시간 일찍 회의를 소집한 부장 앞에서 나는 “전 그렇게는 일 못해요!” 라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런 나를 붙잡고 한참을 어르고 달래서 ‘항명 사태’가 부드럽게 지나가도록 도와준 차장이 K 선배다.

종각의 한 샤부샤부 식당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열심히 야채와 고기를 뜨거운 육수에 담가 먹었다. 그러다 주52시간제 얘기가 나왔다. 6시 칼퇴하면 여가 시간에 뭘 하냐는 나의 물음에 K 선배는 조금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휴대폰 카톡 채팅방 리스트를 보여줬다.


“요즘에 친구들한테서 마구 마구 연락이 온다.”

“왜요?”

“다들 이렇게 일찍 퇴근해본 적이 없어. 퇴근하는데 어둡지 않고 밝으니까 너무 어색해.”


그래서 이제 와 갑자기 예전 친구들을 찾는단다. 직장생활 20년이 다 돼 가도록 야근에 치어 살다가 한순간 야근이 사라지니까 다 같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껏 취미란 걸 만들 시간도 없었다. 칼퇴근하고 가족과 있는 것은 하루 이틀이다. 부인도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이제는 꼬박꼬박 귀가하는 걸 귀찮아해서 눈치를 준다나. 상황이 그러다 보니 눈칫밥 먹는 친구들끼리 모이게 되고, 동창 모임까지 결성되었다고 K 선배는 말했다.


“그럼 만나면 뭐 해요?”


등산도 가고, 그냥 호프집에서 술도 마신단다. 토요일에는 당일치기로 땅끝 마을 여행도 갔다 왔단다. 어디서 뭘 하든 오가는 얘기는 비슷하다고 했다. 취미 없는 중년의 가장들은 “우리 어쩌다 이렇게 살고 있지?” 라고 다 같이 한탄하다가, 주식이며 아파트며 최근에 재미를 쏠쏠하게 본 재테크 간증에 열을 올리다가 헤어지는 식이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거나, 반대로 말수가 줄어드는 사람도 있었다. 모임에 참석한 누군가는 그런 날 밤이면 의기소침해져서 침대에서 상념에 빠지기도 했다. (그 누군가가 바로 K 선배였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K 선배 나이가 되면 누굴 만날까?’ 생각하고 있는데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 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였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안 만나면 노화 속도가 빨라질 위험이 있다!


자세히 읽어봤다. 일주일에 한 번 친구를 만나는 노인은 매일 친구를 만나는 노인보다 노쇠 증후군 발생 위험이 11%가 높고, 한 달에 한번 친구 만나는 노인은 그 위험도가 다섯 배나 높았다고 했다. 노쇠 증후군이란 건 노화 속도가 병적으로 빨라지는 거란다. (늙는 것도 Speed Limit가 있나 보다.)

이 연구를 한 교수는 “친구를 만나면 우울증을 막을 수 있다, 사람을 만나면 음식을 먹게 되니 영양실조도 막을 수 있다”라고 인터뷰를 했다. 한 가지 더. “가족과 이웃을 만나는 것보다도 친구를 만나는 게 노쇠 증후군을 가장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라고 교수는 강조했다. 또래에서만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유대감’ 때문이란다.


그런데 연구 결과에 사회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교수님의 진지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 기사에는 짧은 시간에 댓글들이 주르르 달렸다.


개뿔, 친구를 만나면 돈만 쓰게 된다, 돈이 있어야 친구도 만나는데 그렇게 돈 쓰다 보면 궁핍해져서 못 만나게 된다, 돈 없으면 건강까지 안 좋아진다, 결국 돈 없고 친구 없고 질병만 달고 사는 비극적인 노년기를 보낼 확률이 높아진다. 이런 식이었다.

또 아무리 오래된 친구 관계라고 해도 사소한 이유로 조금만 틀어져도 관계가 툭툭 끊어지는데 과연 젊어서부터 돈과 시간을 친구에게 투자할 필요가 있냐는, 경험에서 (사골국물처럼) 우러난 비관론도 즐비했다.


어느새 그 글을 읽는 나마저도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친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오히려 단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정서적으로 지지를 받아서 우울증이 예방된다고 하는데,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올 때 왠지 모르게 우울함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 정서적으로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 주고, 내가 잘 될 때 배 아파하지 않고,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도 초라함을 느끼지 않게 해 줄 친구라야만 내 늙어가는 속도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을 텐데, 어디 그런 친구가 흔하게 있냐고!


억지로 이어가는 친구 관계가 주는 스트레스란 건, 친구가 한 명도 없어서 생기는 스트레스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친구의 말 한마디에 가슴을 콱 찔려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내가 주변의 누군가에게 그런 상처를 주는 친구일 확률은?

.............(긴 침묵).


이러니 친구 덕 봐서 동안으로 살기엔 영 글렀다. 남탓만 할 일은 없으니.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