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명의 지인 세 명의 친구
최근 흥미로운 글을 봤다. 영국의 한 콘퍼런스에서 카네기멜론 대학 연구진이 선보인 ‘감정 배설 로봇’에 대한 연구 발표 기사였다. 사람들이 우울하거나 화가 날 때 이 로봇을 던지거나 때리고 찌를 수 있도록 고안된 로봇이라고 했다.
호기심이 일어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찾아봤다. 기대와 달리 복잡한 기술이 들어간 것 같지 않은 단순한 모형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것이 우리의 행동에 즉각 반응을 한다는 거였다. 꺄꺄꺄 하며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는 로봇(인형이란 말이 더 어울리지만)을 내동댕이치면 로봇이 그 괴상한 웃음을 멈춘다. 다른 종류의 감정 배설 로봇은 털이 북슬북슬하게 나 있다. 거기에 날카로운 것을 쿡 찌른다. 그러면 꿈틀, 꿈틀 하며 몸을 움직이다가 송곳 같은 걸 뽑으면 그제야 잠잠해진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쌍둥이 조카는 요새 한창 애착 인형을 하루 종일 물고 빨고 한다. 부드러운 천으로 된 강아지 모양의 봉제 인형이다. 아무 반응이 없어도 그저 재밌고 좋은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라면서 어느 순간부터 애착 인형은 시시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부터 인형은 장난감 상자 맨 밑바닥에 처박혀서 몇 년 지나면 어디다 주기도 뭣한 처지가 돼서 헌 옷 처리함 같은 곳에 가차 없이 버려지게 된다.
장난감을 떼고 나면 그때부터 감정 배설의 대상은 (슬프게도) 사람이 된다. 나는 스물다섯에 첫 직장에 들어가고 나서 직장에 가까운 곳으로 원룸을 얻어 살았다. 격주 주말마다 집으로 갔다. 2주일 내내 회사에서 흠씬 (말로) 두들겨 맞고 나서 그로기 상태로 있다가 부모님 집에 도착할 즈음에는 피로가 정수리까지 쌓여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럴 때 집 현관을 열고 들어가서 엄마 얼굴을 보기만 해도 그냥 짜증이 확 났다.
“엄마, 빨리 밥 줘.”
“배고프지? 반찬이 별거 없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시켜줄까? 나가서 먹을까?”
“아, 됐어! 뭐야, 나 올 줄 알았으면서 집에 먹을 것도 없어?”
그럴 때마다 엄마는 조금 슬픈 얼굴로 둘째 딸의 짜증을 묵묵하게 받아냈다. 주방에서 허둥지둥 허름한 반찬통을 있는 대로 꺼내고 있는 엄마의 굽은 뒷모습을 보면 난 더 짜증이 났다. 엄마는 그 시절 나의 '감정 배설 로봇' 이었던 거다.
나중에는 나의 애인들이 감정 배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더 사랑한 죄’라는 오글대는 죄명을 뒤집어쓴 상대들은 액받이 무녀처럼 성실하게 내 짜증과 화를 받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엄마가 아니었으므로 내 분노를 무한정 받아주지는 못했다. 짜증을 배설하면 할수록 나는 더 악한 사람이 돼서 더 무례해졌다. 나의 그런 찌질하고 못난 모습을 너무나도 속속들이 잘 아는 그가 싫어졌다. 그의 인내에도 한계가 다가왔다. 당연히 추한 이별이었다. 그때 나의 못난 모습을 철저하게 다 목격한 그의 기억이 두려워 나는 뒤늦은 후회에도 다시 연락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어느 순간에는 입장이 뒤바뀌어 내가 상대의 감정 배설 로봇이 되기도 했다. 내가 더 사랑해버려서 상대의 감정의 오물을 다 뒤집어쓰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시간은 허투루 흐르지 않았다. 내가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던 딱 그만큼 나는 세상을 더 알게 됐다. 사람의 마음속에 상처의 기억을 남기는 가해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 알게 됐다. 몸이 아닌 마음에 남겨진 상처는 어쩌면 누군가의 일생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권력자들은 무명의 여배우를 감정 배설 로봇 정도로 여겼기에 악행을 저지르고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다닌다. 사람을 사람이 아닌, 자신의 감정 배설을 위한 도구로. 회사에서는 위엄 있고 한편으로는 유머러스한 가면을 쓰고 지내다가 밤이 되면 음침한 룸에서 추악하게 자신의 숨겨놓은 감정을 토해버리는 사람들.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의 추악한 모습이다.
어쩌면 나 역시 은연중에 지금도 감정을 배설할 대상을 기어이 찾아내서 잔인한 칼날을 찔러넣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회사에서 가장 만만한 후배에게, 선량하고 오래된 친구에게, 나를 더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보다 은근하고 훨씬 더 교묘한 방법으로 내 앞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게 하면서도 꽤 예리한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다 (어른다운) 어른이 된다면 그때는 감정 배설 로봇이 없어도 될까? 나는 모르겠다. 감정은 스스로 풀 수 있으면 가장 좋지만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찾은 가장 어른다운 방법은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다. 자신의 말과 기분을 정확한 단어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감정이 상당 부분 개운하게 해소된다. 실제로 어떤 책에 몰입해 읽고 나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표현할 수 없이 답답했던 감정들이 스르륵 풀릴 때가 있다. 그것이 내가 책을 읽고, (가끔) 글을 쓰는 이유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자전적인 성장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진짜 멋진 책은 다 읽은 후에 작가가 엄청 친한 친구처럼 느껴져서 내킬 때마다 전화를 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감정을 비워내는 게 가장 고상한 방법이지만, 법륜스님의 쾌도난마식 말씀을 좇아 그렇게 사는 것은 들을 때만 잠깐일 뿐 속세에서는 실천이 쉽지 않다. 앞에선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면서도 돌아서서 누구와 어깨를 부닥치기라도 하면 차지게 욕부터 나온다.
그래도 우리는 안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소중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모두 다 가지기도, 지켜내기도 어려운 것들이다. 나는 내 안의 잔인한 무심함을 걷어내고 내가 타인에게 준 상처들을 찬찬히 돌아본다. 그것은 섬세한 관찰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 자신만 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나와 같은 비중으로 놓고 보아야지만, 내가 누군가를 무자비하게 로봇으로 만들어버리는 죄는 짓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지만, 사람이 꽃보다 소중하다는 데에는 동의하니까. ‘감정 배설 로봇’은 기술을 접목한 아이디어의 결과지만, ‘감정 배설 사람’은 무심함의 결과일 뿐이다. 젊은 시절에 감정을 여기저기 배설하는 우를 범하다가는 자칫 머리카락 수백 가닥이 든 수프를 원샷하면서 느낄 정도의 엄청난 고통을 인생 말년에 느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삶은 왜 이렇게 끔찍하단 말인가?
삶이란 머리카락이 둥둥 떠다니는 수프와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수프를 마셔야 한다.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