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명의 지인 세 명의 친구
프레너미frenemy란 단어를 들어 본 적이 있는지?
프레너미는‘친구’(friend)와 ‘적’(enemy)의 합성어인데, 사랑과 미움을 오가며 유지되는 친구 관계를 이르는 말이다. 우호적인 척 하지만 속으로는 경쟁심을 품고 있는 존재, 앞에서는 친한 친구라고는 하지만 뒤로 돌아서 험담하고 질투하고 모함하기까지 하는 경우를 아우른다. 친구의 탈을 쓴 경쟁자랄까.
대체로 영화나 TV에서 젊은 여자 배우들이 이런 프레너미 역할을 맡는다. 남자를 사이에 두고 갑자기 원초적인 질투 감정을 드러내면서 망가지는 모습은 관객이나 시청자들의 비웃음을 산다. 친구가 예뻐져도 눈을 옆으로 흘기면서 시샘한다. 반면에 남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프레너미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대신 남자의 우정에는 의리라는 단어가 자주 따라붙는다. 그런 우정은 어지간한 외부의 태클에도 끄떡없을 것만 같다. 탤런트 김보성이 말끝마다 무턱대고 “의리!”라고 외칠 때마다 웃기면서도 남자들만의 전유물 같은 생각이 들어 소외감이 든다. 여자는 속좁고 예민하고, 남자들은 거칠고 투박하다는 편견이 미디어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은근하게 오래가는 인간관계를 지향하고 있지만 그것은 내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모두 판이하게 다른 사람 둘이서 만났을 때 어떤 감정의 화학작용이 벌어지게 될지 미리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우정도 화단 속 꽃 가꾸기처럼 일방적인 관계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슬프게도, 내 의지와는 별개로 지난해 나는 하나의 우정을 끝냈다. 한 친구와 절교를 하게 된 거다. 선후배 사이로 만났지만 나이가 같아서 우리는 꽤 친밀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고민을 공유했다. 그런 친구와 어떤 문제로 한 순간에 연락이 끊겼다. 문자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이 오지 않았고, 우리는 만나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 관계가 됐다. 마음 아파하는 나에게 남편은 혼잣말하듯 말했다.
“여자들의 우정이란 참 얕단 말이지.”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남편의 우정이 시험대에 올랐다.
남편은 회사에서 친한 동기들 세 명과 대학 동아리 친구들처럼 붙어 다녔다. 한 명이 결혼을 할 때 시시콜콜한 것까지 공유했고, 한 명이 이혼을 하는 데에도 발 벗고 나섰다. 퇴근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녔고, 누가 봐도 끈끈한 동기애를 보여주었다. 한 번은 나와 군산 여행을 하다 아귀찜 맛집을 갔는데 “얘들이랑도 꼭 다시 오고 싶다!”라고 말해서 여자 친구인 내 빈정을 상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다 올해 남편 혼자만 승진하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그 윗 기수가 승진 대상이었는데 남편이 선배들을 누르고 동기 중에서도 유일하게 파격적으로 승진하게 된 것이다. 똑같이 평사원이던 그들 중에서 처음으로 한 명이 승진한 것이다.
그러자 이 두 명의 동기들의 반응이란 게, 남편의 예상과는 달랐다. 남편은 동기들이 혹시라도 서운해할까 봐 그날 저녁 삼겹살집 회동을 가졌다. “괜찮다, 괜찮다, 축하한다.” 말하던 친구들은 술이 좀 들어갔다 싶었을 때 터트리듯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승진해서 그게 열이 받는 거야, 난!”
그놈의 우정은 그날로 금이 갔다. 입사하면서부터 친했으니 남편은 자신의 30대가 통째로 부정당한 것 같다며 정말이지 참담해했다. 밟고 서 있던 땅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는 것 같아 보였다. 개구지게 놀던 고등학생 모습은 사라지고 풀 죽은 넥타이 부대원 한 명이 바닥에 굴러 떨어진 작은 나사처럼 홀로 외롭게 남아 있었다. 나는 각자 다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충분히 서운해 할 수 있다고 대변해줬다. 너는 왜 맨날 남의 편만 드는 거냐며 면박을 받았지만.
그 자리에서 "거봐, 여자들의 우정이랑 남자랑 뭐 다른 게 있어?"라고 상처에 소금 뿌리고 싶지 않았다. 속으로만 생각했다. 역시 남자든 여자든 우정 앞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남의 슬픔에는 공감하고 도와주려고 하지만, 좋은 일에 정말 맘 속 깊이 기뻐해 주기는 쉽지 않다. 특히 자신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일이거나 한 분야에 같이 몸담고 있는데 친구가 잘 되는 걸 보는 건 상대적으로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질 수 있어서 더 그렇다. 같이 출발했고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앞서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누구라도 질투가 날 수밖에.
실망스러운 우정의 민낯을 보여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나는 내가 지켜나가고 있는 은은한 우정의 면면을 가만히 되돌아보게 됐다. 몇 명 안 되는, 소박하게 남아있는 우정 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와 내 친구들은 서로를 보살펴주면서 나아가고 있다. 회사 생활에서, 그리고 결혼해서 남편과 시댁과의 관계에서 약자 위치에 놓이기 쉬운 우리는 서로의 상태를 길게 말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하면서 공감하게 된다.
나와 가장 오래된 친구는 그 인연이 이십 년이 다 돼 간다. 하지만 나는 한 명의 친구를 만난 것 같지 않다. 여러 겹으로 된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다. 그 친구뿐만이 아니다. 여자 성별을 가지고 태어난 내 친구들은 그런 굴곡을 만날 때마다 꼭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 같다. 신기한 일이다.
내가 아는 그 친구인데도 꼭 내 친구 같지 않은 모습으로 몇 번씩 힘겹게 내 앞에 나타난다. 나는 그 고비들을 조금 거리를 두고 지켜본다. 시간차를 두고 나 역시도 그런 과정을 겪는다.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아이를 키우면서 달큼하면서도 시큼한 냄새를 온몸으로 풍기는 친구를 보면서, 현재에 지극히 충실한 모습들을 보면서, 친구와 닮은 핏덩이가 친구의 가슴팍에 꼭 붙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열심을 다해서 살아 나아가고 있구나’라고 강렬하게 느낀다. 지금 이 정도 크기의 우정을 이어나간다면 앞으로 살면서 외로움의 극단까지 갈 일은 없겠다, 라는 낙관적인 생각에 잠시 취하게 된다. 모든 만남은 깨지기가 너무나 쉽다는 것을 알기에, 한 편의 불안감이 여전히 마음 구석에서 똬리를 틀고 있지만.
십 년 우정의 깊이를 알아버린 남편은 여전히 그들과 술자리를 하지만 더 이상 속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에게 예외라고 생각했던 프레너미가 바로 가까이에 있었음을 인정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