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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저 Aug 13. 2019

사기잡법의 정석

정우성이 광고하는 모 회사의 전기면도기가 있다. 남편은 그 제품이 막 나올 때부터 예술품에 가까울 정도로 자태가 고급스럽다며 한눈에 반했다. 내가 보기엔 모델인 정우성 후광효과도 있는 것 같지만 그는 성능 역시 뛰어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그로서는 구매를 실행하기까지는 아내의 시큰둥한 반응이 걸림돌이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며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러다  금요일 늦은 저녁, 인터넷 서핑을 하던 남편의 레이더에 중고나라가 포착됐다. 

중고나라에서 그 면도기를 30만 원에 판다는 게시 글이 올라온 것이다. 남편은 신나서 말했다.


“이건 사는 사람이 득템이야!”

     

시중가보다 족히 십만 원 넘게 싼 값이었다. 판매자는 회사 행사에서 경품을 받은 건데 필요 없어서 안 쓰고 미개봉 상태로 갖고 있다고 했다. 사진도 여러 장 첨부했다. 직거래를 원한단다. 거래 시 예의 있게 하면 조금 깎아줄 수도 있다고 했다.

남편은 바로 문자를 했다. 게시자는 통영에 산다고 했다. 서울 사는 우리가 머나먼 통영까지 갈 수 없는 노릇이니, 택배로 보내기로 했다. 남편은 딴사람이 사갈까 봐 서둘러 송금했고, 판매자는 이미 밤이었으므로 다음날인 토요일 오전에 보낸다고 했다.


     

다음날 점심때가 지나서 문자를 보내자 “외출 중이어서 오후 늦게 보내겠다.”는 답장이 바로 왔고, 이때부터 수상한 낌새가 있었지만 일말의 희망을 갖고 기다렸지만 저녁부터는 아예 전화조차 받지 않고 연락이 두절됐다.

   

맞다. 이것은, 사기였다.

     

그날 저녁 바로 사이버수사대에 신고 접수를 하고, 그 사람 아이디로 올린 다른 게시 글을 검색해 봤다. 다른 전자제품들이 이삼십만 원에 여러 건 올라와 있었다. 면도기 판매 글에는 우리 말고도 2명의 피해자들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당했다’ 고…….   

우리는 판매(사기)가 진행 중일지도 모를 다른 게시글 밑에 ‘이 게시자 지금 연락두절이다, 방금 경찰에 신고했다. 여러분도 사기 조심하라’는 댓글을 남겼다. 그러자 댓글 올린 지 채 오 분도 안 돼 그 게시 글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모니터 앞에서 죽치고 있던 사기꾼이 꼬리를 밟히자 중고나라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불을 켜자 바퀴벌레들이 사사사사사사사삭 싱크대 밑으로 숨어버리듯이. 


게시글을 차례차례 지우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우리는 어이가 없기도 했고,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이 중고나라 사기꾼은 '중고나라 사기의 정석' 이 아니었던가 싶다.  

(1) 분명히 입질이 올 만한 괜찮은 상품을 올린다.  

(2) 헐값은 아닌데, 이렇게 싸게 또 나오긴 힘들 것 같은 가격에 올린다.

(3) 좋은 상품을 피치 못해 내놓는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이 있다.

(4) 직거래를 원한다는 전제를 깔아 신원에 대한 의심을 안 하게 한다.

(5) 잘만 하면 좀 깎아줄 수도 있을 것처럼 해서 친절을 유도한다.  

(6)금요일 저녁에 거래를 해서 택배를 바로 보내지 못하는 알리바이를 만들고,  경찰 신고도 더디게 한다.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가 사기 범죄로 세계 1위라고.  

왜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을까.

     

당해보니, 그건 범행 액수로 얼마 안 된다고 마냥 죄질이 가볍다고 할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상습 사기꾼들은 얼굴에 “나 사기꾼이요”라고 절대 써놓지 않는다. 그런 사람일수록 수더분하고 서민적이단다. 사기꾼이 작정하고 덤벼들면 속지 않을 사람 없다고도 한다. 사기를 당해본 사람들은 그 순간 ‘뭐에 쓰인 것 같았다’고들 말하며 땅을 치고 후회한다.  

인간의 심리나 행동은 복잡한 것 같지만, 이럴 때 보면 실은 매우 단순하기도 하다. 그들은 ‘잘 속는 사람들의 심리 코드’를 정확히 알고 파고든다. 어떤 이의 욕망을, 어떤 이의 불안을, 어떤 이의 기대를, 어떤 이의 믿음을, 어떤 이의 선의를 정확히 겨눈다. 그렇게 쉽게 번 돈으로 그들은 어떤 하루를 보낼지, 어떤 얼굴을 하고 범행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궁금하다.

     

**

경찰서 사이버수사대에 가니 빈칸에 단어와 피해액 숫자 정도만 써넣을 수 있게 양식이 마련돼 있었다. 복도에서 대충 이 서식을 채우고 가라고 했다. 이 별것 아닌 사건은 탁구공 신세가 됐다. 사건 담당 경찰서를 옮겨 다니는 데에만 꼬박 2주가 걸렸다. 2주 만에 겨우 사건 담당자가 정해진 것이다. 아마 이런 자잘한 건에는 신경 쓰지 않을 테고, 설사 그놈을 잡는다고 해도 그 돈을 돌려받기는 어려울 게다. 

사기범에 한 번, 경찰에 또 한 번 마음의 상처를 입은 남편에게, 아, 면도기를 사줘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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