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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저 May 26. 2019

부자들은 가난마저 훔친다

한 유명 밴드가 순식간에 여러 구설에 휘말렸다. 멤버가 학창 시절 학교폭력의 가해자였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자진 탈퇴한 데 이어 이번엔 보컬의 아버지가 주요 사건에 연루된 뇌물 사업가란 의혹을 제기하는 뉴스 보도까지 나오면서 이 밴드의 많은 팬들이 순식간에 안티로 돌아섰다. 보컬은 하루 만에 장문의 해명 글을 내놓았다. 자신은 사건과 관련이 없고,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한 이후 어렵게 음악활동을 해나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수성가형 청년 음악가들로 조명되고, 지하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모습에서 음악에 대한 열정과 진정성을 느꼈던 시청자들은 그의 기나긴 해명에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나는 아직 알 수 없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한 시민은 뉴스에 짧은 한 문장의 댓글을 남겼다. 


‘부자들은 가난마저 훔친다.’    

     

이 말은 박완서의 단편에 나왔다. 판자촌에 사는 여주인공이 도금공장에 다니는 한 가난한 청년을 알게 되고 “같이 살면 하룻밤에 연탄 반 장을 아낄 수 있다”는 이유로 동거를 하게 된다. 요샛말로 하면 ‘썸’을 탄다. 하지만 그 청년은 어느 날 사라진다. 나중에 갑자기 나타나서 청년은 말한다. 자신은 사실 부잣집의 대학생 아들이라고. 아버지가 빈민촌에 보내 가난을 한번 경험해보게 한 것이라고. 여주인공은 큰 충격을 받고 울부짖는다. 이제 부자들이 가난마저 훔쳐간다고.  

     

그들은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가지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에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박완서, 《도둑맞은 가난》-         


경제·산업부 기자로 십 년 넘게 일해 온 나는 다방면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인터뷰는 대개 2시간 안팎으로 진행됐고, 인터뷰에 노련한 그들은 내가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기어이 쏟아냈다. 기사 쓰는 건 시시할 정도로 수월했다. 그들만의 단순한 도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했더니 성공했다, 이러저러한 엄청난 고난과 갖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이겨냈다, 이러이러한 교훈을 얻었으니 신문 독자에게 꼭 강조해 달라. 이것이 정답 공식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하지만 이미 성공한 이들에게서 듣는 성공담이란 답안지를 보고 베끼는 수학문제처럼 김이 샜다. 그렇게 살아도 성공하지 못한 이들이 무수하고, 그들의 성공담에는 반드시 크고작은 과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독 타이밍에서 운이 따랐고, 호의를 가진 좋은 인연을 만난 행운들이 그들에게 있었을 것인데 그들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것을 극복한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는다는 게 거북했다.   

자신의 성실함만으로 가난을 극복하고자 발버둥 쳤던 한 사람의 사연을 기억한다. 시계방을 운영하다가 IMF까지 겪으면서 빚을 지기 시작했고, 빚더미는 3억 5천만 원까지 불어났다. 빚을 갚기 위해 그는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하루 22시간씩 일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일해서 기어코 빚을 모두 갚았다. ‘알바왕’으로 불리며 유명세를 얻어 책까지 쓴 그는 이제 인생이 좀 펴나 싶었지만 5년 뒤에 대장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잠자는 시간 없이 일해 온 그의 피나는 노력은, 불공평하게도, 그에게 해피엔딩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 젊고 찬란한 밴드가 가난을 코스프레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퍼져나가는 와중에 나는 문득 한 사람을 기억 속에서 소환했다. 지금은 유명해진 젊은 가수다. 엄마는 그와 한때 같은 교회에 다녔다. 가족끼리 아는 사이여서 그 가수가 뜨기 전 과정과 뜨는 과정, 집안 형편들에 대해 엄마의 입을 통해 종종 들어왔다. 유명해지며 금세 부를 축적한 그는 TV에 나와 젊을 때 이런저런 식으로 겨우 돈을 벌었고, 자주 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웬만한 의지 없이는 음악을 계속하기 어려웠다고 하면서 그 시절을 습관적으로 회상했다.

하지만 내가 엄마에게 듣기로는 그의 20대 초반은 실제로 가난과는 거리가 있었다. 부모를 부양하지 않아도 됐고, 적어도 두 채 이상의 집이 있었다. 한마디로 당장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황이었다. 번듯한 작업실도 부모가 마련해 줬다. (자신이 의도했든 아니든) 자신의 성공을 더 빛낼 요량으로 가난을 포장지 삼고 있는 것이었다. 부자들의 가난 절도 행각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란 거다.  

 

문제는 그렇게 부자들이 가난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가난한 자의 아픔에 공감하게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희롱한다는 것이다. 가난을 기어코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가난을 철저히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난한 자들의 마음까지 기어코 훔쳐내서 부를 더-더 축적하는 이들의 민낯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면서 소설의 여주인공은 소리친다.

“넌 뭐니, 넌 뭐야? 이 새끼야. 넌 부자니, 부자야?”


이렇게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도 그 부잣집 아들은 히죽히죽 웃다가 이내 편하게 잠들어 버리고 만다. 여주인공이 그러든지 말든지 말이다. 부(富)는 이렇게 잔인할 정도로 가난에 끝까지 무심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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