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연극 유감
대학로 골목에 들어섰을 때부터 앞만 보며 걸었다. 눈을 마주치면 성실한 청년들이 잽싸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아주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예매하셨나요?”
“예매하셨나요?”
(무려) 오 년만의 대학로 연극이었다. 그래서 좀 설렜던 것 같다. 신종 코로나 때문에 망설이기는 했지만 예매했던 것을 굳이 취소하고 싶지는 않았다. 150석은 되어 보이는 극장이었다. 우리 자리는 앞에서 두 번째 줄 가운데였다. 마스크를 쓴 관객들이 둘씩 짝지어 극장으로 들어왔다.
다들 맨 앞 줄 중앙, 두 번째 줄 중앙, 세 번째 줄 중앙에 다닥다닥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넓디넓은 관객석인데 양옆에 빽빽하게 앉아있는 건 영 별로란 생각에 티켓 검사하는 직원에게 다가가 물어봤다.
"연극 시작 전인데 몇 줄 뒤 자리로 가도 괜찮을까요?"
“안 되세요.”
왜 안 되는지는 묻지 않았다. 운영 원칙이려니 했다.
관객석이 텅 비어 있으니 왠지 불안했다. 스타들이 자신의 연극배우 시절 관객이 몇 명밖에 되지 않아서 그냥 무대에 앉아서 서로 얘기하며 놀았다는 둥, 암전 몇 번 되고 나니까 관객이 딱 한 명만 남았다는 둥 토크쇼에서 본 ‘무용담’들이 생각났다. 그 정도로 분위기가 썰렁했기 때문이다. 연극 시작 전에 관객이 몇 명인지 세어보고 싶었는데, 도중에 불이 꺼져서 실패했다. 하지만 내가 굳이 셀 필요가 없었다. 연극이 시작되자 주연 배우가 애드리브로 계속 “27명밖에 안 왔는데 뭘...”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 같이 웃자고 한 애드리브였지만, 그 농담을 듣는 내내 불편했다. 27명밖에 오지 않아서 내가 왠지 송구스러워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연극이 시작됐지만 쉽사리 극에 집중하지 못했다. '관객과의 호흡'이라는 연극 특색을 살리려는 건지 배우들은 자꾸만 관객들에게 말을 걸고, 극 초반부터 특정 관객을 딱 ‘찝어서’ 외모를 가지고 놀렸기 때문이다. (그 위치의 관객에게 하자고 배우들끼리는 합이 짜여진 것이었겠지만..) 나와 내 일행(둘 다 A형)은 혹시 우리에게 말이라도 걸까 긴장했다. 우리의 긴장된 표정과 억지 웃음을 봤는지, 두 주연 배우는 우리를 건너뛰고 옆자리 두세 명에게 외모를 가지고 농담 애드리브를 이어갔다. 얼굴이 뭣 같다거나, 추상적이라거나 이런 식이었다.
연극에서 거슬리는 건 또 있었다. 성적 농담이 다분히 시대착오적이었다는 것이다.
남성의 성기 사이즈를 가지고 농담을 한다거나, 연극 중간에 망사스타킹을 신고 엉덩이만 겨우 가린 짧은 원피스를 입은 ‘여장 남자’ 배우의 흐느적거리는 춤이 그랬다. 관객석을 향해 금방이라도 오줌을 눌 것처럼 바지 지퍼를 내릴까 말까 반복하는 그 연기들에서는 얼굴이 찌푸려졌다.
'성인지 감수성'이 대단히 떨어져 보이는 장면들도 있었다. 젊은 여자가 데이트를 하면서 잔뜩 삐지고 토라지는 모습을 희화화할 때는 불편감이 들었다. 다분히 젊은 여성을 비하하는 듯한 연기였다. 그래도 나는 웃음 포인트(인 것 같은) 타이밍마다 기계적으로 웃었다. 하하.. 하하하...ㅎ ㅏ...
다른 사람들은 그냥 재밌게 봤을지도 모른다. 이 혹평은 순전히 내 기대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마냥 웃으려고 보는 '개그 콘서트 느낌'의 연극을 예매한 게 아니었다. 국내 유수의 배우들이 거쳐간 오래되고 유명한 연극이어서 오 년만에 보러 간 것이다. 아무리 관객 참여적인 연극이라고 하더라도 연극의 지킬 선은 지켜야 한다. 극은 밀도 있게 진행되어야 하고,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연극이 끝나고 인터넷으로 그 연극의 줄거리를 찾아봤다. 극에 반드시 설명되어야 할 대사들은 쏙 빠져 있었다. (황당할 정도였다.) 내가 본 연극에서는 쉴 틈 없이 웃기겠다는 배우들의 무리한 농담만 난무했을 뿐.
이것 말고도 자잘한 아쉬움도 많았다. 이 연극을 이끌어가는 배우 A 씨는 드라마로도 많이 알려져 있었다. 연극 제작사는 그 배우를 앞세워 홍보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연극을 보니 연극을 위한 발성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고, 대사 전달력이 매우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웃기려고 말을 빨리 하니, 그의 발음은 갈수록 더 뭉개졌다. 연예인을 코 앞에서 보는 게 신기하다, 는 생각으로 연극 티켓을 끊었던 건 아니니까. 씁쓸했다.
나도 인정한다. 재미가 최우선이고, ‘노잼’을 못 견뎌하는 시대라는 걸. 하지만 이 대학로 연극을 보면서 느꼈다. 처음부터 목표를 '재미'에 놓고 달려가는 예술이 그 재미를 놓쳤을 때 얼마나 비루해지는지... '웃겨야 산다!'는 게 지금 대학로 연극판의 팍팍한 현실인 걸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대학로 벽마다 붙어있는 연극 포스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웃음 보장' '관객 대폭소' '강력한 웃음' '포복절도!' 내가 왜 웃음에 그렇게 인색했는지, 그들은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