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출근길 지하철에서

by 진저

서점에서 제목만 보고 단번에 고른 에세이《설레는 일, 그런 거 없습니다》를 읽다가 ‘전철 안에 사람들이 말랑말랑한 소모품처럼 빈틈없이 꽉 차 있다’는 문장을 만났다. 그러자 퍼뜩 나의 출근길 한 때가 떠올랐다.


늘 그렇듯 좀비처럼 창백하면서 초점 흐린 눈빛으로 나선 아침 7시. 내가 타는 3호선은 악명 높은 9호선만큼은 아니더라도 출근자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날도 그랬다. 나는 몸에 힘을 빼고 이리저리 갈대처럼 휩쓸렸다. 그 와중에도 기어코 휴대폰을 얼굴 가까이 대고 보고 있던 그때였다. 갑자기 묘한 긴장감이 감지됐다. 내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심상치 않았던 거다. 표정보다도, 애써 억누르는 그 소리란 게. “으, 욱. 욱.”


영화〈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처럼, 그 30대 넥타이맨은 간밤의 안주들이 중력을 거슬러 식도를 타고 목구멍 위로 기어이 올라오는 것을 혼신의 힘으로 막고 있었던 거다. 욱욱 거렸지만 주변 사람들은 대놓고 쳐다보지는 않았다. 지금 자리를 옮길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내가 내릴 안국역이었다 싶어, 안도하던 그때. “으-잇-취!”


어떻게든 버텼는데, 재채기는 끝내 참지 못했던 것이다. 넥타이맨을 곁눈질로 주시하던 주변 사람들은 미세하게 인상을 쓰고 반사적으로 몸을 조금씩 옆으로 옮겼다. 정말 압정 하나 박힐 틈 없을 것 같던 그 공간이 신기하게도 남자 주변으로 빈 공간이 생겨났다. 단 한 명, 그 남자의 바로 앞에서 큰 헤드폰을 끼고 서 있던 긴 머리 여성만 제외하곤.


그 여자의 머리칼에는 넥타이맨이 뿜은 토사물이 덜렁덜렁 붙었다. 정말이지 비극이었다.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헤드폰에서 흐르는 음악에 골똘하게 집중하고 있었다. 남자는 얼굴이 빨개졌고 어쩔 줄 몰라했다. 이 여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서 “머리카락을 좀 확인하셔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해야 하나. 모두가 망설이는 와중에 평온함을 잃지 않은 것은 안내방송뿐이었다.


‘이번에 내리실 역은 안국입니다.’


안국역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사람들을 뚫고 하차했다. 옆을 보니 그 남자도 쫓기듯이 내렸다. 남자의 도착지가 정말 안국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인파 사이로 빠르게 사라졌다.


날벼락을 맞은 그 여자의 불운을 동정하면서, 말해주지 않은 공범이 된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뒷사람이 뿜은 토사물을 뒤집어쓴 여자는 누구를 원망하고 있을까. 원인 제공자가 이미 내려버린 지하철에서 그녀는 뒤늦게 머리를 만진 뒤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주변에 아직도 그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낯빛 안 좋은 주변 승객들을 하나씩 쏘아봤을지도 모르겠다.


늘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서 도착한 나는 사무실 내 자리에 앉아서 잠시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가 대충 묶은 내 머리칼을 멋쩍은 듯 두어 번 쓰다듬었다. 다음 토사물 세례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못 보고 겨우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하루가 또 시작된 것이다. 그날 내내 나는 기 드 모파상의 소설《여자의 일생》에 나오는 한 구절이 생각났다.


“운명의 집요한 가혹함에도, 인간이란 언제나 날씨가 화창할 때면 희망을 품기 마련 아니겠는가.”


사는 건 분명 억울한 일 투성이다. 지하철 그 여자는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 앞에서 종일 억울해할 것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것들이 그렇게 인과 관계가 없고, 얽히고설킨다. 노력한다고 결과가 늘 좋은 것은 아니고, 내 책임이 아닌데도 옴팡 뒤집어쓸 때도 허다하다. 누군가 내 뒤통수에 실례를 하는, 운이 억세게 안 좋은 날이 언젠가 내게도 분명 닥칠 것이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버텨온 기억들을 찬찬히 되돌아보면 사는 건 날씨와 비슷하다. 늘 흐리지는 않다. 언젠가 화창한 날이 오고야 만다. 그렇게 일희일비하는 것이 일상이다. 다음날 여느 때처럼 지하철에 올라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면서도 그 억울한 일상 가운데에서도 행복과 희망이란 존재를 기어코 찾아내는 것이 우리네 평범한 삶의 존엄이라고 나는 믿는다.


월간에세이》 지난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9월에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내년 상반기 출간을 목표로 원고를 쓰느라 요새 브런치에 좀처럼 새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네요. 그래도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살짝 야심이 였보이는 글을 보는 재미는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야심가들의 건필을 바랍니다.

다들 평안하고 따뜻한 겨울을 맞으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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