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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저 Jun 15. 2021

인생은 번개처럼 지나가지만, 시간은 충분해

〈가장 가까운 위로〉

누구에게나 매일 주어지는 하루      

                                    

한때 교복처럼 입던 코트 두 벌이 옷장에서 몇 년째 빛을 못 보고 있다. 새 옷들에 밀려 겨울 내내 처박혀만 있었다. 미안하지만, 디자인도 확실히 한물갔다. 흰색 앙고라 코트는 딴에는 비싸게 주고 샀는데 드라이클리닝을 제때 안 해서 누런 기운이 있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 쇼핑한다면 무난하게 그레이나 블랙을 고를 텐데. 또다른 코트는 정장 느낌이 과하게 풍겼는데 격식 있는 자리에 갈 일이 거의 없고, 무엇보다도 편한 게 최우선인 지금의 내 코디 철학과는 영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두기엔 그 덩치 좋은 친구들은 안 그래도 비좁은 옷장에서 자리를 많이 차지했다. 나이와 체형에 상관없이 평생 동안 입을 수 있는 코트를 갖는 건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처럼 영원히 젊은 뱀파이어를 애인으로 두는 것 같은 기적일까. 영혼의 코트를 만나는 판타지를 상상하며 애물단지가 된 옷들을 현관 옆에 내려놨다. 그 상태로 며칠째 구겨져 있으니 남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것들, 언제 버릴 거야?”


‘버린다’는 말에 왠지 저항감이 들어서 안 버릴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서울로 대학을 오기 전까지 이십여 년간 여섯 식구가 좁은 집에서 부대끼며 살았다. 우리 사 남매는 소풍 때마다 메이커가 크게 박혀 있는 옷을 사달라고 엄마에게 난리를 피웠지만, 사실은 서랍장 칸칸마다 옷들이 폭탄계란찜처럼 부풀어 있었다. 언니가 입은 옷을 내가 물려받고, 그 옷이 작아지면 어느새 몸이 나만 해진 여동생이 그걸 입었다. 


그렇게 소녀 세 명을 쉴 틈 없이 주인으로 모신 옷들의 은퇴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엄마가 그걸 바로 안 버리고 걸레로 썼기 때문이다. 걸레짝으로 적합하지 않은 재질의 옷이라도 꼭 한 번씩 바닥을 훔치고 나서 버렸다. 당시 우리 넷은 하루에도 각자 몇 번씩 뭔가를 꼭 엎지르거나 흘렸을 때였으니, 엄마로선 휴지 몇 칸이라도 아껴보자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낡은 옷들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은 본질적으로 어릴 적 목격했던 엄마의 몸속 깊이 밴 절약과 닮아 있다. ‘아, 좀 아까운데. 한 번이라도 입어야 하나.’



버릴까 말까를 고민하는 그 며칠 사이에 해가 바뀌었다. 남편이 이번엔 새해 계획이 뭐냐고 물었다.

 “올해도 영어공부와 다이어트지”라고 말하고 나서, 조금 우울해졌다. 


이 두 가지는 정말이지 인간의 나약함을 늘 깨닫게 한다. 끝이 없다. 매일, 매달, 매해 실패한다. 뇌과학적 조언과 계획 세우기의 요령을 다룬 연구들과 책, 다큐멘터리 등을 봐도 반짝 그때뿐이다. 내년은 올해와는 뭔가 다를 거야, 라는 희망을 가지려던 게 ‘영어’와 ‘다이어트’란 단어를 입 밖에 내는 순간 무참히 깨진다. 갑자기 ‘낡고 오래된 새해’를 받아든 느낌이랄까.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려면 사실 방법은 간단하다. 양말 건조대 용도로 둔갑한 실내자전거에 올라타 열심히 페달을 굴리며 빨간 모자 선생님의 유튜브 영어회화 동영상만 잘 보고 큰 소리로 따라하면 된다. 그걸 오늘 하고, 내일 하고, 모레, 글피, 그글피까지 하면 된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잘 안 된다. 실내자전거 옆에는 크고 안락한 소파가 떡 하니 있고, 유튜브는 끝도 없는 알고리즘으로 나를 잡아챈다. 아마 이 글을 쓸 시간에 자전거 페달을 십오 분이라도 굴렸다면 새해 목표에 도달할 확률은 더 높아졌겠지만, 실내자전거 안장과 핸들에는 물기 있는 양말들이 여전히 쌓여 있고 지금 나는 노트북 앞에 등 구부리고 앉아 이렇게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다.



(하지 않고 있는)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해야 할 분명한 이유 단 한 가지만 있으면 우리가 해낼 거란 걸. 앞서 내가 세운 두 가지 목표는 냉정히 따지고 보면 해야 할 명확한 이유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하면야 좋은 것들이었다. 누구에게 좋은가 하면, ‘다른 사람의 눈에 비춰지는 내 모습’이 좋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 진짜 속마음은? ‘영어는 생존영어가 되면 그 이상은 필요가 없고, 다이어트 역시 경계선에 가깝긴 하지만 어쨌든 정상체중 범위에 있으니 현 상태를 유지만 해도 되는 게 아닐까.’ 이런 반발심이 깊숙이 숨어 있다. 


철학자 칸트가 매일 같은 시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책을 했던 것은 골격 기형이라는 운동 동기와 심각한 건강염려증으로 인한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강력한 필요만이 강력한 행동을 낳는 것이다. 대다수가 속하는 반대편의 경우는 어떤가. 절실하게 원하지도 않는 목표를 목표인 ‘척’ 가지고서 아등바등하는 나 같은 ‘보편적인 사람’들로 바글댄다. 


이건 좀, 뭔가 잘못됐다. 꾸 자기 자신을 속이다보면 스스로를 실패자나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몰아세우게 되니 말이다. 징글징글한 악순환이다. 그렇다면 내 안의 거짓 목표부터 제거하면, 지금까지 계속 실패했으니 이번에도 실패할 거라는, 이 징글징글한 자기 비하를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나는 중고거래 앱에 올려도 반응이 없는 그 옷들을 헌옷수거함에 넣었다. 버리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집 안의 해묵은 것들을 대신 정리해주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정리를 의뢰한 출연자들은 마지막에 가서 꼭 눈물을 보였다. 카메라 앞이라 오버한다고 코웃음 치던 시청자 중 한 명이던 내가 이 옷가지 한두 개 버리는 데에도 이리 복잡한 마음이 들고 나서는 그들의 눈물이 조금 이해가 됐다. 


그렇게 옷을 버리면서 새해를 맞는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이제 낡은 목표들을 꾸역꾸역 새해로 가져오는 대신에 오늘 하루, 이번 주의 결심만 세우기로 했다. 당장 지금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하면서 내 안의 불안을 가라앉히기. 이것이 올해 결심한 새로운 목표다. 


그러다 몇 달이 지나서 또 ‘내가 그 옷을 왜 버렸지? 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살을 빼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후회가 ‘찐하게’ 들면 그때 가서 하면 된다. 괜히 돌고 돌아 다시 영어와 다이어트로 오는 거 아니냐고, 시간만 허비하는 거 아니냐고 무안을 줄 사람도 있겠지만, ‘시작 타령’과 ‘후회’를 되돌이표처럼 반복하는 나 같은 위인들을 향해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말했다. 인생은 번개처럼 지나가지만, 시간은 충분하다고. 


‘번개처럼 지나간다’는 건 냉정한 충고다. 하지만 ‘시간은 충분하다’는 말에서, 실수를 만회할 이십사 시간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매일매일 주어진다는, 먼저 살아본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공평하고 단단한 위로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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