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나도 멈추지 않는 더위

제주에서 바라본 계절의 변화

by 소소함

올해도 어김없이 처서가 지나갔다. 예로부터 처서는 '더위가 그친다'는 뜻으로, 이맘때면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가을의 전령이 찾아온다고 했다. 하지만 올해의 처서는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연일 30도를 훌쩍 넘나드는 기온에 사람들은 여전히 에어컨을 틀고, 반팔을 입고 다닌다.


제주도로 이주한 지 10년, 나는 이곳에서 계절의 미묘한 변화를 몸으로 느끼며 살아왔다. 서울에서 살 때는 콘크리트 정글 속에서 계절의 변화를 온전히 느끼기 어려웠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다르다. 한라산의 능선이 조금씩 색을 바꿔가고, 바닷바람의 온도가 미묘하게 달라지며, 들판의 억새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을 통해 계절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이런 자연의 리듬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음을 느낀다. 예전 같으면 8월 말이면 한라산 중턱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서늘해졌을 텐데, 올해는 9월이 되어서도 여전히 따뜻하다. 아침 산책길에서 만나는 제주 토종 식물들도 혼란스러워 보인다. 어떤 나무는 이미 단풍이 들기 시작했는데, 어떤 나무는 아직도 한여름처럼 푸르다.


며칠 전, 성산일출봉 근처를 걸으며 한 할머니를 만났다. 평생을 제주에서 사신 분이었는데, "요즘 날씨가 예전 같지 않다"며 한숨을 쉬셨다. "내가 어릴 적엔 처서만 지나면 밤에 이불을 덮고 잤는데, 요즘은 9월이 되어도 선풍기를 틀어야 한다"고 하시며, 자연의 변화에 대한 걱정을 내비치셨다.


그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개인의 힘으로는 지구 전체의 기온 상승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연의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는 있지 않을까?


제주의 바다는 여전히 아름답다. 하지만 예전보다 수온이 높아져서 아열대 어종들이 더 자주 발견된다고 한다. 한라산의 식생대도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다. 이런 변화들을 목격하며, 나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처서가 지나도 멈추지 않는 더위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계절감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예전의 24절기가 주는 의미를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새로운 리듬을 찾아가야 할 때인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제주의 올레길을 걸으며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비록 예상보다 더운 바람이 불어와도, 그 속에서 가을의 전령을 찾으려 노력한다. 돌담 사이로 피어나는 들꽃들, 하늘을 가로지르는 철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조금씩 길어지는 그림자들 속에서 말이다.


자연은 변하고 있다. 우리도 함께 변해야 한다.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자연이 주는 위로와 깨달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처서가 지나도 계속되는 더위 속에서, 나는 오늘도 제주의 자연과 함께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