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덕에서 마주한 여유

조금 쉴까

by 소소함

오랜만에 낸 휴가였다. 회사 일에 치여 몇 달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얻어낸 소중한 시간이었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한 곳은 함덕해수욕장이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바쁜 일상에 쫓겨 제대로 앉아서 바라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해변가 벤치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니,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에메랄드빛 바다는 오늘따라 더욱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고, 멀리 우도가 신기루처럼 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얀 백사장 위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연인들의 속삭임, 가족들의 정겨운 대화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내 옆으로는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갔다. 갓 걸음마를 뗀 아이를 안고 바다를 보여주는 젊은 아빠, 모래성을 쌓느라 여념이 없는 초등학생들, 파라솔 아래에서 책을 읽는 중년 여성, 그리고 나처럼 그저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사람들까지. 각자의 이유로 이곳에 와서 각자만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문득 '여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언제부터인가 내 삶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것이 되어버린 그 단어 말이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와 일정에 쫓기다 보니,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것조차 특별한 일이 되어버렸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려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만큼은 시간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짠맛이 섞인 그 바람은 도시의 매연 냄새와는 전혀 다른, 자연 그대로의 향기를 품고 있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니 폐 깊숙한 곳까지 맑은 공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어깨에 쌓였던 피로가 바람과 함께 날아가는 듯했다.


해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하루하루가 새로운 모험이었다. 언제부터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기 시작했을까? 언제부터 '바쁘다'는 말이 입에 달고 살게 되었을까?


옆에서 연인으로 보이는 커플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웃는 그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거창한 성취나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범한 순간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짜 행복이 아닐까?


파도가 백사장에 닿았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해서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점점 고요해졌다. 파도의 리듬은 일정하면서도 매번 조금씩 달랐다. 마치 인생처럼 말이다. 같은 듯 다른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그 속에서 작은 변화와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삶이 아닐까 싶었다.


해가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바다 위에 황금빛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시선을 멀리 보내니, 수평선 너머로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곳에는 내가 찾고 있는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달았다. 일상에 쫓겨 놓치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함께 말이다. 자연이 주는 위로, 사람들의 소소한 행복, 그리고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까지. 이 모든 것들이 내 마음을 차근차근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벤치에서 일어나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어보았다.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모래의 감촉이 새로웠다. 아이들이 만든 모래성을 지나치며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창의력이 부러웠다.


함덕에서 보낸 이 오후는 단순히 휴식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잃어버렸던 내 자신을 다시 찾는 시간이었고,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내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오늘 이곳에서 느낀 평온함과 여유로움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끝없이 파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자연의 모습에서 위안을 얻으며, 나는 천천히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