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갓생을 사는 게 유행이라고 하던데...
갓생의 시점에서 나의 하루를 바라보면 갓생도 이런 갓생이 없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이들 도시락과 아침 식사 준비, 애들이 아침 식사 마치면 남편과 바통 터치하고 아침 운동하러 출발. 운동하고 돌아와 샤워하고 청소기 윙 돌리고 아점으로 배를 채운 후 업무 시작. 보통 늦은 아침을 하기 때문에 낮 시간엔 사람도 안 만나고 밥도 안 먹고 집중해서 최대한 많은 일을 마친다. 우선 메일 답장을 보내고, 처리할 행정 업무가 있으면 간단한 일은 바로 처리한다. 시간이 필요한 건 일단 일과표의 빈 시간에 일을 배정해 놓고 넘어간다. 이후 수업을 하러 가거나, 강의 준비, 자료 개발, 연구 관련 글쓰기, 연구 디자인 등의 혼자 처리하는 일을 할 때가 많지만 관련 미팅들도 심심치 않게 있기 때문에 통으로 시간을 쓸 수 있는 날과 쪼개어 써야 하는 날을 구분하여 업무를 배정해야 일을 방해받지 않고 마칠 수가 있다.
저녁이 되면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으로 대략 한 시간 잡고 집으로 출발.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은 보통 몸의 피로를 풀어줄 겸 걸어서 퇴근! 그다음 엄마로서의 하루 일과가 다시 시작된다. 저녁 식사, 아이들과 대화 (허락해 주신다면), 기타 잡무들... 그리고 저녁 미팅 (해외 파트너들과의 협업 또는 컬리지의 업무 관련)이 있는 날은 다시 서재로 들어가 미팅 참석.
식사 후 집안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9시쯤 다시 연구 관련 일을 하거나 책을 읽기 시작한다. 밤에는 메일을 최대한 보지 않고 온전히 두세 시간을 내가 원하는 대로 보내려고 노력한다.

우와... 하루 일과를 이렇게 써 놓고 나니 정말이지 하루를 꽉 채워서 보내고 있구나, 난.
수능이 끝나고 다음 날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40대 후반에 이른 지금까지 항상 이런 식으로 살아온 듯하다. 하는 일들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운동, 돈벌이, 책 읽기가 일과에서 빠진 적은 없다. 지금은 아이들도 있으니 경제 활동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어쨌거나 소위 '갓생'을 사는 나로서는 돌아보면 그다지 큰 목표도 없는데 왜 이렇게 사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난 돈도 별로 쓰지 않기 때문에 지금 돈이 필요하거나 앞으로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망도 제로에 가깝고, 승진이나 어떤 자리에 대해서도 큰 욕심이 없다. 사실 더 큰 책임을 지는 높은 자리보다는 백의종군이 나에게는 더 어울리는 편이다. 그런데 주변에선 나더러 '너무 열심히 산다'고들 하니 이게 무슨 아이러니일까?
너무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사실 차분히 앉아 뭐가 날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지 생각해 볼 겨를도 기회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가끔 몸이 너무 피로해져서 내가 원하는 만큼 따라주질 못하니 이제야 그 이유와 동기를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며칠 동안 생각해 본 결과, 내가 사랑하는 나의 모습은 뭔가를 열심히 하는 나의 모습이어서가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거울 속 아름다운 자기의 모습이라거나 프로페셔널한 모습,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모습을 사랑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나의 모습은 그냥 뭐가 되었든 120%를 쏟아붓는 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난 필연적으로 밤이 되면 곯아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나 할까? 40대 중반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후반에 접어드는 지금은... 가끔 나의 이런 운명이 원망스럽다. 다른 의미의 아크라시아인 것이다. 의지적으로는 'SLOW, 마음의 평화, 고요함을 추구하겠다! 고 외치면서도 하루가 시작되는 '준비, 땅!' 소리가 나면 마치 무의식적 반응처럼 쌩하고 달려 나가는 사람이다. 마치 파블로바의 개처럼 하루가 시작되는 중이 울리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자기애에 빠져 살아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난 요즘 갓생, 갓생 하는 사람들이 안타깝다. 갓생을 끊지 못해 이렇게 피곤해하는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선 제발 좀 느릿느릿, 적당히 살아갈 수 있다면 너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