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팀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다들 처음 가보는 길을 가고 있자니 헛발질을 여러 번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이때 어떤 팀원이 이건 말을 했다.
내가 열정이 살아있을 때 이 일을 했더라면 더 열심히 했을 텐데...
열정?? 나로 말하자면, 열정에 기대어 일을 추진하거나 일을 끝까지 밀어붙여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굉장한 도박이라고 생각한다. 열정은, 말하자면 불쏘시개 같은 것이지만 꾸준히 날마다 찾아오는 업다운을 이겨내기 위해 충분한 동력은 될 수 없다. 마치 우리가 난로에 불을 땔 때 첨엔 번개탄으로 불길을 일으키지만 지속적이고 따뜻하고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잘 마른 장작이 필요한 것과 같다. 불이 확 피어올랐다가는 장작이 금세 타서 재가 되어버린다. 오래 불씨를 유지하려면 은근하게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열정으로 시작했던 몇 가지 일들이 있었다. 바이올린이 너무 좋아서 엄마를 졸라 그 시절 그 비싼 바이올린을 사고 레슨을 받기 시작했지만 일 년이 가질 못했다. 연습을 매일 해야 하는데 그저 레슨만 다니니 실력은 늘지 않고 소리는 여전히 깽깽거리고 늘지도 않고... 열정은 쉽게 식어버렸다. 또, 대학 시절엔 외환이랑 금융 관련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외환딜러가 되고 싶었다. 불길이 타오른 난 후다닥 공부해서 외환관리사 자격증도 땄고 금융 회계 관련 공부를 계속해 보았지만 기본적으로 내 깜냥에 맞지 않는 분야였다. 수업에서 사례 분석이나 시뮬레이션에선 게임처럼 재미있던 외환 거래가 현실에선 나의 개인적인 신념과 너무 달라 나의 열정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두 상황 모두, 시작할 때 꿈꿨던 나의 미래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슈트를 입고 외환 시장을 날아다니는 전문직 딜러였으니, 겨우 시작하는 참에 이미 난 10년 후 최고 멋진 내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이 어떠할까엔 무관심하고 내 맘대로 상상한 결과물에 빠져 망상과 열정으로 허영심에 가득 차 있었다.
반대로 처음엔 특별한 열정이 없이 아무 생각하지 않고 시작한 러닝이나 대학원 공부는 꾸준히 하다 보니 슬럼프나 특별히 싫어지는 계기가 없었다. 첨부터 뜨겁지 않았으니 꺼질 불길도 없었고 오히려 예상치 못한 소소한 재미와 성취의 경험은 노력을 계속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석사를 시작할 땐 박사는 내 계획에 없었고 교수는 당연히 내가 원하는 길도 아니었다. 석사를 마치고 여러 선택지가 있을 때 우연히 고른 것이 싱가포르행이었고 이어서 박사와 교수라는 단계로 넘어갔는데 이건 인생의 매 갈림길에서 하나씩 선택한 결과일 뿐 계획한 건 아니었다. 러닝 역시, 원래 댄스를 하던 내가 회사일로 시간 내기가 점점 어려워져 틈날 때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차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지금 25년이 넘게 해 오고 있으니, 처음에는 절대 예상하지 못한 지금의 내 루틴이다.
내 인생에서 공부와 러닝의 공통점을 돌이켜 보면, 둘 다 별 기대 없이, 아무런 열정 없이 시작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나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달리고 공부를 한다. 산이 거기 있으니 등반하는 것처럼 그냥 달리기를 하기로 했으니 정해진 날엔 달리러 나간다.
지금도 난 뭔가 큰 목표를 가지고 운동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달보다 1km라도 달린 거리를 늘리는 게 나의 목표라면 목표랄까? 아침 수업이 있는 수, 금을 빼곤 숨 쉬듯 운동하러 나간다.
공부의 일상화도 마찬가지이다. 난 자기 전까지 책을 읽거나 뭔가를 쓰다가 잔다. 운동과 집안일을 할 때 빼곤 읽거나 쓰는 것으로 모든 시간을 보낸다. 사실 오늘 이 글도 아침에 달리다가 떠오른 영감을 재빨리 메모한 후 샤워하고 앉아서 쓰고 있다. 하지만 내 목표는 정교수가 되거나 기가 막힌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읽고 쓰는 건 나 그 자체이다. 그러나 매일 이걸 하다 보니 이런 일로 먹고살기도 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
열정은 타 버릴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정말 끝을 보고 싶다면 시간과 노력의 투자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또는 아무 생각하지 않고 반복하는 것도 괜찮다, 나처럼.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려도 괜찮다는 마음의 여유는 필수. 어차피 기대 수명도 길어졌는데 뭐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