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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and Jun 26. 2020

노동의 가치, 노동자의 자세

이재명 지사의 기본소득에 대한 주장을 듣고

나는 지금까지 항상 노동자(고용인)였다. 수능 시험을 마치고 다음 날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경제 활동을 멈춰본 일이 없다. 전형적인 학교 교육과 전형적인 부모님 아래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 '노동은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살아왔다. 규칙적으로 통장에 꽂히는 월급 중독, 주택 구입을 목표로 하는 저축, 여가에 소비하는 것에 대한 죄의식... 이런 생각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되었고, 나의 생활, 행동 양식도 이에 맞춰 변화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 와서 살면서, 나의 생활 패턴은 한국과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싱가포르인들의 생활양식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 열심히 공부하여 자력갱생을 목표로 함, 주택 구입을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삼음, 금융상품에 관심 많음). 다만 주택 소유율 90% 이상인 이 나라는 정부가 국민 대부분에게 주공 아파트 (HDB)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생활에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100년 소유 기준, 정부가 정한 기준에 따라 구입 가능, 정부에서 가격 규제) 싱가포르인들의 노동은 사실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하기보다는 한탕주의가 강하다. (단기간에 고액 임금을 받는 직업이 인기가 많고 이직률이 엄청 높으며 해고도 쉽다)


나 역시 월세를 내고 10년 이상 살면서 내 노동의 가치와 재산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최소 아이들이 학업을 마칠 때까지는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국제학교 학비+집 모기지를 갚으려면 규칙적인 수입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나는 내 직업을 사랑하고 따라서 나의 노동은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말이며,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노동이 그렇게 신성하고 즐거운 일이고, 먹을 자격까지 운운할 정도로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라면 어찌 많은 사람들이 불로소득을 취하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는가!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은 더 이상 낯설거나 특정 집단의 사람들만 공감하는 말이 아니다.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장래 희망으로 건물주를 꼽았다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노동은 고통스러운 것,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기인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 출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즐기러 가는 것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러 가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일'은 더 이상 노동의 개념이 아니라 자아실현을 하는 수단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자세로 직업을 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모든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업도 있을 것이고, 특히 실업자가 늘어나고 있는 이 시점에 이런 말은 배 부른 소리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시점에 이재명 지사가 기본소득을 주장하며 전제한 노동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크게 공감을 하게 되었다.


36분부터 이재명 지사가 설명하는 노동에 대한 자세를 들어 보세요.


이재명 지사가 표방하는 기본 소득 정책은 4차 산업 시대에 우리가 스스로의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매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우리는 막연히 내가 대체 가능한 노동력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 4차 산업 시대를 한편으로는 설렘으로 한편으로는 두려움으로 맞이하고 있다. 실제로 뉴스를 보면 '향후 10년 안에 없어질 직업'이라든가, '노동자의 X%는 로봇이 대체할 것이다'라든가의 주제의 글을 많이 볼 수 있다. Uncertainty, 즉 불확실성은 여러 정책을 낳게 하고 논의를 하게 하는데, 특히 나의 존재 가치와 일대일로 매칭해 온 나의 노동의 가치가 흔들린다니 지금처럼 불안한 시대가 없다. 한국의 많은 노동자, 고용인들은 회사에서 역할 놀이에서 자신의 가치를 매겨왔다. 회사에서 부장이면 나의 아이덴티티도 부장, 회사에서 사원이면 아이덴티티도 사원으로 회사라는 한정된 커뮤니티 내에서 자기의 임시 역할을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해 왔기 때문에 내가 노동자이고 고용인이게 하는 그 노동의 가치를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자본가, 고용주들은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며 이런 노동의 가치에 대한 확대 해석을 부추긴다. 산업 혁명의 발상지인 유럽에서는 이미 19세기부터 시대를 앞서가는 여러 철학자, 학자들은 이런 자본가들이 만들어 낸 환상에 경고를 보내왔다. [게으를 권리]를 쓴 폴 라파르그,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쓴 버트런트 러셀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은 태생이 너무나 다르지만 결국 주장하는 것은 노동은 노동 자체로 존재하여 우리에게 빵을 주는 수단이 되어야지, 직업이나 노동의 종류 자체로 인간의 가치를 매기거나 정의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버트런트 러셀이 하는 말 중 '자본가들은 오래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노동자들은 부추기면서 왜 자신의 아들, 딸들에게는 노동을 시키지 않는가'라는 직관적인 문제 제기를 하였다.

우리도 일하지 않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열심히 일해서 저축을 하고 은퇴하여 일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날을 꿈 꾼다. 나는 더 이상 '앞으로 올 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냥 일은 일에 불과하며,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에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되, 30% 정도의 시간과 노력은 여전히 내가 특별히 즐기지는 않지만 해야 할 일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노동을 하고, 직업을 갖는 사실 자체에 대해 너무 심각해지거나 의미 부여를 하지 않기를 원한다. 나의 아이들에게도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되 거기에 수입까지 생기면 금상첨화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본 소득이라는 것에 대찬성이다. 노동이 나를 '자유롭게'해야지, 노예로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국가에 속해주고, 세금을 내주는 이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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