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유튜브 '애니멀봐' 채널에서 영상을 정주행 하다 그 영상 아래에 달린 한 댓글을 보고 나는 그만 무릎을 쳤다.
개: 저 사람이 나에게 먹이를 주고 도와준다. 저 사람은 신인가 보다.
고양이: 저 사람이 나에게 먹이를 주고 도와준다. 나는 신인가 보다.
'와, 통찰력 대박이다!'
사람이 나에게 먹이를 주고 도와준다는 같은 현상을 두고도 개와 고양이는 각각 해석하는 방향이 달랐고 그로 인해 전혀 다른 행동 방식들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사람에게 충성하는 개와 사람을 집사 취급하는 고양이, 이렇게.
개와 고양이, 그나마 인간하고 가장 가까운 동물들인데도 성격이 참 다르다. 그러다 문득 그랬다.
'사람은 또 개개인이 얼마나 다 다른가...!'
누군가는 사람과 함께 해야 힘이 나는 사람,
누군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 사람.
누군가는 그때 그때마다 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누군가는 쌓아놨다가 한 번에 치워야 하는 사람.
사진: Unsplash의Priscilla Du Preez
근데 비극은 이때 벌어지는 것 같다. 내가 어떤 동물인지 모른 채, 내가 아닌 다른 동물에게 통용되는 룰을 나에게 적용시킬 때. 예를 들어 한 20대 여자가 있다고 해보자. 연애를 아직 해보지 않은 그녀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는 이런 이야기는 들어봤다. 여자는 도도해야 한다고. 그래야 남자들이 싫증 내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녀는 도도한 척, 연락에 목매지 않는 척, 아쉬운 것 없는 척 해버린다. 그러면서 그녀는 서서히 깨닫게 된다. 사실 자신은 연락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양이나 할 수 있는 일을 개가 하려고 하니 이게 잘 될 리가 없다.
사진: Unsplash의Eric Prouzet
근데 인생의 아이러니는 이런 비극 속에서 내가 누군지를 알아간다는 거다. 내가 개인지 고양이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동물인지는 이 모든 시행착오 속에서 알게 된다. 처음부터 내가 개라는 걸, 고양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다.
대게 나와 다른 무언가를 만나면서, 내가 견딜 수 없는 어떤 상황들을 겪으면서, 그렇게 되어 보려고 했으나 도저히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아는거다.
'나는 고양이는 절대 못 되는구나...'
다른 누군가와 나는 무엇이 다른지 알아가는 과정, 나는 왜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어하는 것인지, 내가 만난 나 스스로에 대한 한계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나에게 물어보는 시간들은 나를 알아감에 있어 중요한 데이터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려 한다.
사는 일은 때론 고양이가 되어 보려는 시도 속에서 내가 개라는 걸 알아가고, 그를 통해 개로서 행복한 삶을 찾는 여정인 것 같다. 다르게 말해, 타인이 되어 보려는 시도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고 그를 통해 나로서 행복한 삶을 찾는 여정 아닐까. 그래서 부딪혀보고, 거부해보고, 좌절해보는 일은 결국엔 나에게 옳은 일이 될거라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