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딱 보면 척 하고 안다니까요
한국에서 2년 남짓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 일상에 새로운 루틴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 있었는데, 그건 '롯데 자이언츠 야구 경기 시청'이었다. 때로는 사직야구장에서 직관으로, 대체로는 집에서 TV로. 내가 타자가 휘두른 방망이질 한번에 환호와 탄식을 쏟아내고 투수의 공 하나에 울고 웃는 야구팬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렇게 야구에 빠져들수록 내게 흥미롭게 다가온 야구 용어가 있었는데, 그건 '선구안' 이었다.
'선구안 : 야구에서, 투수가 던진 공 가운데 볼과 스트라이크를 가려내는 타자의 능력.'
그저 투수는 스트라이크만 잘 던지면 되고, 타자는 공을 방망이에 잘 맞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야구는 그것들만이 중요한 스포츠가 아니었다. 투수의 투구 한번 한번에 타자와의 치열한 심리싸움이 있었다. 좋은 투수는 타자의 공을 뜬공으로, 땅볼로, 헛스윙으로 유도했다. 좋은 타자는 9회말 2아웃 만루 역전 찬스 상황에서 볼넷으로 출루하여 때로는 1회에 친 1점 홈런보다 더 큰 기쁨을 관중들에게 선사하기도 했다. 그러니 좋은 타자라면 좋은 선구안을 갖춰, 이 공이 쳐서 안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인지, 지금 이 순간만 잘 참아내면 결국 변화구로 떨어져 자신에게 유리한 볼 판정을 받을 공인지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난 그 찰나의 순간에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서른 다섯 해를 살면서 내 인생에 날아들었던 갖가지 선택의 순간들에 나 역시도 이건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게 맞는지, 아니면 못 먹어고 고!를 외치는게 맞는지 고민하고 선택해왔다. 때로는 선택 하지 않겠다는 선택 조차도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20대에는 안 될걸 뻔히 아는데도, 그저 내 마음이 가는대로, 누군가는 무모하다고 할지도 모르는 선택들을 하기도 했었다. 부풀어 오르는 내 마음을 누르기 어려워 뮤지컬에 도전 해본다던지, 이게 외로움인지 상대에 대한 그리움인지 잘 파악하지도 못한 채 고백을 먼저 해버린다던지. 그 과정들에서 많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많이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의 과정과 결말을 아는 30대가 되고서는 선택에 대해 나도 모르게 이런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결말이 훤히 보이는 일에 굳이 내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아. 이제는 지는 게임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나는 내 이런 변화야말로 20대의 내 시간이 30대의 나에게 선물로 남긴 교훈이자, 내 경험을 바탕으로 나만의 철학을 갖춘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라 생각했다.
'그래, 나에게도 어느덧 선택의 선구안이 생긴거야.'
장거리 중이던 남자친구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고 했을 때, 놀랍게도 '나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될 줄 알았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봤다. 정말 그들이 애시당초 내 남자친구가 바람 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내내 나에게 귀띔 한 번 해주지 않은건지, 아니면 그들 스스로 찰나의 순간에 품었던 의심이 그 순간 기억나며 스스로의 선견지명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 말 속에는 묘하게 '너는 어떻게 그런 것도 몰랐니?' 라는 나의 '보는 눈 없음'에 대한 비난이 섞여 있는 것 같아 그들과의 대화는 그 다음부터 진행되지 않았다.
나름 사람을 잘 본다고 자부하던 꾸꾸조차도 당시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허겁지겁 내 연애의 잔해들을 함께 처리해주기 바빴었고, 나보다 인생을 더 산 엄마나 친한 언니도 그 상황에 놀라며 '이미 벌어진 일이고 네가 한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 말들에 위로를 받으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정말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이런 일을 자초한 건지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만난 이 '선구안'이라는 개념이 나는 몹시 반가웠다.
'연애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껴보며, 나도 이제는 남자를 보는 눈이 좀 더 생겼다고. (원래도 없지도 않았지만!!!) 나, 이제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그렇게 나는 더 나아진 선구안을 가지고 있다 믿으며,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시행 착오를 미리 줄여가며, 나를 아프게 할지도 모를 일들로부터 나를 보호하며, 나에게 완벽한 찬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공을 열심히 골라 내다 방망이 한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타석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종료된 이닝에 대해 난 미련과 아쉬움을 느끼는 중이다. 당신의 마음은 뭐냐고 한번 물어라도 볼껄.
그 이후 아무리 그 결말이 훤히 보이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 길을 택하면 아주 뜨거운 용광로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걸 안다 하더라도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선택지나 인연이라는 것이 인생에는 있기도 하다는 걸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내 앞의 투수의 주무기가 떨어지는 변화구임을 뻔히 아는데도 차마 방망이가 돌아가는 걸 멈추지 못하는 타자처럼. 그런데 또 그렇게 친 공이 홈런이 되기도, 안타가 되기도 하는게 인생이 아닌가 싶다.
선구안이 생겼다 자부하던 나는 다시 주어지는 매 기회마다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 나이에 비례한 나잇값이나 연륜, 성장한 내 모습에 대한 뿌듯함 그런것 말고 그게 조금은 무모해 보일지언정 다시 내 마음이 가고자 하는대로 나를 이끌어봐도 되지 않을까. 결국 돌고 돌아 예전의 나로 돌아온건가 싶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열심히 치고 달리는 어느 스포츠를 생각해보면 홈으로 돌어온 나를 기쁘게 맞아도 될 것 같다.